[상상사전] ‘미나리’

▲ 최은솔 기자

자기 전 불을 끈다. 처음에는 암흑만이 가득하지만 얼마 있으면 사물의 윤곽이 다시 드러난다. 암순응이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불을 끈 것도 아닌데 암순응을 목격하기도 한다. 지난겨울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양주시 마석역 부근 아파트촌 주변 야간드라이브 때였다. 양쪽으로 밝은 빛이 쏟아지는 아파트가 빽빽한 비룡로를 따라 고개마루에 오르면 깜깜한 공장지대가 펼쳐진다. 가로등도 없고 4차선 도로는 2차선으로 좁아진다. 내리막 언덕을 따라서, 조립식 판넬로 지어진 플라스틱 공장들이 드문드문 서있다. 

시내의 불빛이 사라진 어두컴컴한 공장지대에서 이웃을 발견했다. 우리 곁에 있지만 잘 알아보지 못한 이웃인 이주노동자다. 그들을 처음 만난 건 지난 1월 중순 한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들은 다이소 납품용 저금통과 변기통 커버를 찍어내는 플라스틱 공장에서 기계를 능숙하게 만지고 있었다. 

이들은 겉으로 타자에 가까웠다. 노동에 임하는 태도가 다르다. 나는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잠시 용돈을 벌러 온 파트타임 노동자였다. 그들은 고향 태국을 떠나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야근을 자청하는 풀타임 노동자였다. 공장 내 위계도 달랐다. 사장의 작업지시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이라는 것 자체가 가지는 권위가 있었다. 이들은 초짜 아르바이트생인 내게 쉽게 업무지시를 못 했다. 문화 차이도 만만찮다. 스피커 크게 틀어놓은 태국 전통가요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금방 안다. 이미 이들은 한국사회에 녹아 들어 살고 있다. “오빠, 이거 돈 어떻게 내?” 조금 친해진 포장 노동자 ‘넨’이 건넨 핸드폰 화면에는 자동차 보험 연장 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알고 보니 공장 주차장을 채운 여러 대 차는 이들 소유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밤 9시면 공장 앞으로 트럭이 도착했다. 이주노동자들 퇴근 시간에 맞춰 태국 전통 식재료와 향신료, 생활 물품을 파는 트럭이었다. 태국식 고기부터 과일, 태국 쌀까지 갖춰진 태국식 오일장이나 다름없다. 이들 9인방은 손쉬운 k-배달음식을 대신해 매일 태국식 점심을 해먹는다. 1시간 남짓한 점심시간이지만, 그들에게 가장 즐거운 ‘삼시 세끼’ 식사 시간이다. 먹는 거로 스트레스를 푸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 초기 미국 이주노동자 가족을 그린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 KBS

우리 사회는 이들을 진짜 이웃으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이들을 걸핏하면 남으로 여겼다. 이주노동자 집단감염 뉴스가 나올 때마다 이들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너네 나라로 가라’는 댓글은 여전히 상단에 걸려 있다. 국내 이주노동자 숫자는 지난해 86만을 돌파했다. 우리 제조업과 농업 분야에서 빠질 수 없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일하고, 밥 먹고 살아야 하는 이웃이다.

진정한 이웃은 상대를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현실에서 차별적 요소를 차단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인류학자 보르드윈은 전 지구화가 필연적으로 배제를 포함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우리 머리에 이주노동자는 ‘일하는 기계’ ‘해외 인력’ ‘시골며느리’ 등으로 잘못 각인돼 있다. 이런 인식에서 비인간적인 대우가 비롯된다. 지난해 말 포천의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한파 속에 죽어간 캄보디아 노동자는 ‘이웃’은커녕, ‘도구’ 취급을 받았다. 1990년 채택된 유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은 이주노동자가 부적법한 이주와 불합리한 노동 관행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국제사회 역시 이주노동자에 관한 책임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타인에 눈뜨는 기쁨을 우리 사회 모두가 누렸으면 한다. 국적과 문화라는 장벽만 뛰어넘으면 새로운 이웃이 눈에 보일 것이다. 누군가의 ‘갑질’에 격노하는 국민들이 이주노동자와 난민 문제에 냉담한 건 모순이다. 초기 미국 이민자의 삶을 다룬 ‘미나리’가 골든글로브를 넘어 아카데미 시상식에 문을 두드리고 있다. 조금만 기억을 되감아 보면, 우리도 어딘가에서 지독하게 ‘타자’로 배제된 적이 있다. 우리 곁의 ‘미나리’를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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