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불패] 지역 진화의 유전자 ‘청년’

지역 상생 이끄는 ‘삶기술학교’ 청년들

시간여행 웹드라마의 배경이 논두렁이라면? 서해안 백사장에서 요가 수업을 열고, 농촌 마을에서 제빵 기술을 배운다면? 작년 12월 충남 서천군 삶기술학교 한 달 살기 참가자들은 농촌을 배경으로 웹드라마 3부작을 찍었다. 농촌에 도시 청년들이 내려와 창업한 삶기술학교의 단기 체험 프로그램 일부다. 서천군은 몇 년째 소멸 위기 지역으로 지목된 고령화 농촌 지역이다. 

▲ 충남 서천 ‘삶기술학교’ 한 달 살기 참가자들이 웹드라마를 찍고 있다(왼쪽). 요가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있는 참가자들. ⓒ 삶기술학교

'지역은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신개념이 등장했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조희정 연구원은 “지역은 ‘공간’을 넘어 행정구역이나 비수도권이 아닌 ‘역사와 문화적 공통성을 갖는 일정 구역’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고 말했다. 2020년 소멸위험 지역 자치단체가 105개에 이를 정도로 지역 소멸론이 대두되는 시기에 지역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바로 디지털 기기를 접하며 살아온 ‘디지털 원주민’(노마드) 또는 밀레니얼과 Z세대를 합친 ‘MZ세대’로 불린다.

경제∙사회 가치 함께 추구하는 지역창업

그동안 지역에서는 드물었던 공간과 콘텐츠를 창출하고 기술창업을 시도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2018년부터 4년째 이어지는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조성사업은 전남 목포, 충남 서천, 경북 문경에 청년마을을 조성해 수십 명 청년이 정착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청년마을 사업이 전부가 아니다. 문화∙공간 분야 ‘협동조합 판’(춘천), 교육 분야 춘천 별빛 산골 유학 센터, 콘텐츠 분야 제튼(춘천), 음식 분야 버드나무 브루어리(강릉) 같은 공동체들은 지역에서 청년들이 5년 이상 거주하며 창업한 사례다.

청년들의 지역창업은 수익 극대화만을 꾀하는 기회형 창업과 달리 수익과 지역 기여를 동시에 추구한다. 서강대지역재생연구팀이 한국과 일본의 지역 재생을 연구한 결과를 담은 <로컬의 진화>에 따르면, 청년들의 지역 창업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소셜 벤처’로 볼 수 있다. 마을기업을 이뤄, 수익 전체를 지역민과 청년이 나누기도 한다.

한산 소곡주 ‘완판’…’소곡주 돈가스’도 만들어

충남 서천의 청년마을 ‘삶기술학교’는 단순히 청년들만의 수익 창출이 아닌, 지역민과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함께 나눈다. 이 학교는 도시생활에 지친 청년들이 서천군 한산면에서 대안적 삶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삶 기술로 더불어 사는 자립공동체다. 이 학교는 서천에서 지역소멸에 대항하고, 지역 구성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로컬 커뮤니티 벤처 생태계’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

삶기술학교는 서천의 지역자원을 활용한 ‘창조자원’으로 지역민과 함께 상생을 실현했다. 창조자원이란 지역에 이미 있는 특산물이나, 폐건물에 창조성을 더해 새로운 상품이나 공간으로 만들어진 자원을 뜻한다. 삶기술학교는 지난해 코로나 불황에서 한산 지역 특산품 판매로 지역민과 공생에 나섰다. 청년들은 한산 전통주인 ‘소곡주’ 조합과 함께 온라인 유통체계를 만들어 800병 소곡주를 ‘완판’했다.

다른 상품도 잇따라 개발됐다. 소곡주 지게미를 활용해 빵을 만드는 청년팀이 생겨, 현재 서천 특화물 시장에서 판매중이다. 팀원인 김청수(26) 씨는 소곡주 지게미 빵 전분을 활용해 소곡주 돈가스를 만들어 한산면 첫 돈가스 식당 마로스키친을 창업했다. 삶기술학교 김혜진(31) 공동체장은 동네 주민들이 돈가스 식당 개업에 기뻐하는 모습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 한산면 첫 돈가스 집 마로스키친이 개발한 ‘소곡주 돈가스’. ⓒ 삶기술학교

“되게 많이들 오세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주민들도 좋아하시더라고요. 뭔가 ‘칼질한다’는 게 그럴 듯 한가 봐요. 지현리 이장님 내외분이 오셨는데 부인께서 “아 내가 살면서 이렇게 칼질을 해본다”고 하셨어요. 은근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문 닫은 여관이 ‘마을호텔’로 재탄생

폐건물을 활용한 마을호텔 사업도 단순한 리모델링이 아니다. 삶기술학교는 공간의 가치를 고민하고 스토리텔링을 더해 사람들이 찾아올 만한 매력을 갖췄다. 지난해 삶기술학교는 10년 동안 폐건물로 방치돼 오던 한산면 구석의 ‘서광장’ 여관을 사들여 호텔로 바꿨다. 

▲ 문 닫았던 서광장 여관이 마을호텔로 재탄생했다. ⓒ 삶기술학교

삶기술학교의 공간 서비스는 ‘마을 호텔’로 불린다. 호텔이 대개 한 건물 안에 숙박과 레저, 식사 등을 결합해 복합 기능을 하듯이, 한산이란 마을 전체를 호텔처럼 누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정착민들은 호텔에서 숙박하고, 옆에 있는 소곡주 돈가스 집에서 식사하고, 마을 내 독립서점을 이용하고, 갈대밭에서 필라테스 수업을 들으며, 동물 생태 카페까지 이용하도록 한 묶음 서비스를 누린다. 가방 하나 들고 여행하는 ‘백패커’를 주된 고객으로 삼은 결과다. 이 서비스는 일반 관광객에게도 신청을 받는다. 

삶기술학교 올해 목표는 온라인 유통을 키우는 것이다. 우선, 특산품 ‘소곡주’를 해외로 온라인 유통망을 확대하여 수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삶기술학교가 지역 양조장의 술을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바꾸는 브랜딩을 해 판매를 대행해주고, 학교는 유통 수수료로 유지되는 수익모델을 만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역 전통 옷감인 ‘모시’를 활용한 패션 창업이다. 원래 자기 패션 브랜드가 있던 정착민 한장흠(36) 씨는 여기서 모시짜기를 배우고, 본인 가방에 모시를 접목했다. 전통의상에 국한된 모시가 최신 패션 가방, 팔찌, 외투 등에 포인트 소재로 사용된 것이다. 이 패션 아이템은 이미 개발됐고, 와디즈 등의 펀딩 사이트에서 준비가 끝나면 온라인으로 판매할 예정이다.

▲ 자기 상표 가방에 전통옷감 ‘모시’를 결합한 정착민 한장흠 씨(가운데). ⓒ 삶기술학교

지역창업이 꾸준히 유지되려면 협회나 공동체를 이루는 형태가 적절하다. 조희정 연구원은 “현재 활성화한 지역창업은 지역에 관심이 증가할 때 지속될 수 있다”며 “이런 흐름이 이어지려면 시민이 주주가 되어 공동소유를 하는 시민자산화 또는 협동조합, 마을기업 형태가 되면 더 좋다”고 말했다. 마을 일부가 창업으로 부를 창조했다는 식 이야기가 아니다. 목포 건맥협동조합처럼 마을 전체가 합심해 운영방식과 수익 분배를 공동결정하는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직 구조와 경쟁 사회를 거부하다

정착민들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개개인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지역을 살린다는 당위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주체가 되는 것은 개인만의 ‘계기’가 없이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정착민 개개인 이야기는 천차만별이다. 공통점은 대도시 생활에서 ‘경쟁’에 지친 청년들이 하나둘 모였다는 점이다. 8년차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정착한 김혜진 삶기술학교 공동체장은 기업은 빨리 성장해야 하니까 직원은 수직적 문화에 길들여진다고 말했다.

“수직적 회사 구조에서는 사람들이 뭔가에 갈려 나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을 빨리해야 되죠. 빠르게 성장할 수는 있는데 수평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걸 여기서 많이 실험해 보고 있어요. 삶기술학교 공동체 안에서는 일이 재미 있다 하더라도 물론 상처받는 이들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그런 비전의 결과가 어떨까라는 기대가 아직은 더 큰 것 같아요.”

삶기술학교 임시 정착민과 기존 정착민은 매일 저녁 사무실에 동그랗게 모여 수평적으로 프로젝트 피드백을 한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초기 정착민들 중에는 본인이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알아서 계획하고 찾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도 있다.

정착민 차병수(36) 씨는 지역에서 사회적 소비를 이끄는 창업을 꿈꾸며 내려왔다. 3년 동안 서울에서 철강수출회사에 다니던 그는 가치소비적인 측면에서 농식품 소비재, 자연환경을 활용한 관광콘텐츠에서 지역의 사업 가능성을 발견했다. 지역에서 강조하는 지역민 상생, 자연의 생태적 가치를 고려한 소비가 오히려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 마을호텔에 둥글게 모여 프로젝트 피드백을 하는 삶기술학교 구성원들(오른쪽)과 김혜진 공동체장(왼쪽). ⓒ 삶기술학교

‘지역 창업=농사’는 옛말, 비대면 창업이 대세

지역 창업의 업종은 더욱 다양해졌다. 지역에는 비대면 업무가 주를 이루는 업종이 몰린다. 삶기술학교로 주소지를 이전한 정착민은 20명이고, 프로젝트 성으로 일시 정착한 이는 63명이다. 지역 생활은 반드시 365일 지역에 주소를 두고 산다기보다 업무에 맞게 유동적으로 도시와 지역을 오갈 수 있는 생활도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삶기술학교는 올 7월 언택트센터라는 위성사무실을 개설할 예정이다. 또한, 스마트 혁신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 전역에 5G 광대역 인터넷망이 개설된다. 동네 어디서든 인터넷과 공공 와이파이가 연결되면, 본사에 있는 직원이 하루는 서천에 내려와 자연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다가 다시 본사로 돌아가거나, 연수를 진행할 수도 있게 된다.

삶기술학교에 모인 청년 중에는 디자이너, 작가, 개발자, 영상크리에이터 등이 많다. 정착민 A씨는 파워 블로거 출신으로 매주 삶기술학교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과 소통한다. 정착민 정회진(30) 씨가 소속된 모임은 이제 책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시골살이 에세이집 <터놓고 말해서 내 취향은>을 출고했고, 주기적으로 책을 써낼 예정이다.

미디어 창업을 시도하는 것도 이색적이다. 삶기술학교에서 2020년 하반기에 시도한 ‘판교캠퍼스’ 사업은 근대 건축물이 많은 서천군 판교면에서 월간 프로젝트가 두 번 진행됐다. 대학로 주변 공연예술에 관심이 많은 청년 30명이 판교 캠퍼스를 배경으로 20분짜리 농촌 웹드라마 세 편을 제작했다. 극단에서 배우를 하던 정착민들이 직접 출연해, 연기도 어설프지 않다. 그 영상에는 흔히 시골을 재현할 때 떠올리는 ‘전원 드라마’뿐 아니라 1970년대 시대극, 멜로물 등 기존 장르를 탈피하는 시도가 담겨있다.

지역정착 유지는 민관청 삼합에서

김 공동체장은 지역정착이 계속되려면 민(지역주민), 관(중앙 정부, 지자체), 청(정착 청년) 삼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4년 진행한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정착사업의 결론은 ‘지역민 환대 없는 청년 정착’은 지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로컬의 진화>에 따르면, 지역을 찾는 이가 많아지는 것이 지역 주민에게 유무형 혜택을 줄 수 있어야 지역 창업과 주민의 연결도가 높아진다.

김혜진 공동체장은 “2년 전 정착 초기엔 주민들께서 우리를 잠깐 왔다가는 ‘뜨내기’ 아니면 주민들 생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셨다”고 말했다. 마을호텔을 비롯한 공간 사업, 소곡주 판매 등 한산면 지역 주민들과 실질적인 상생 경험을 쌓고 나서야 신뢰가 형성됐다. ‘관계자본’을 형성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행정의 지나친 간섭은 정착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김혜진 공동체장은 “시간이 갈수록 정부 지원을 안 받는 게 가장 좋다”며 “당당하게 저희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로컬의 진화>에 따르면, 지역이 진화하려면 현장 행정, 실용 행정이 따라야 한다. 현장과 멀어진 행정의 결과는 사업계획서 지원 양식이 복잡하고 어려운 행정 용어로 가득 차거나, 예산 집행은 차일피일 밀리는 일의 반복이다.

조희정 연구원은 “국가 지원이 늘어난다는 것이 좋은 면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상하 관계 구조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다”며 “행정체계가 청년문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지원만 확대한다는 것은 의존성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에서도 개선책을 내고 있다. 황석연 서기관은 “행정의 성과를 잣대로 청년들을 평가하지 않고 있다”며 “행정인력과 전문가를 지원해 증빙에 필요한 작업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도시생활

김 공동체장은 서울도 지역이라고 말했다. 삶기술학교와 협업하는 스페인 몬드라곤 대학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해 여러 유니콘 기업을 키워냈다. 그는 스페인 사례처럼 지역에 더 재미있는 일이 많고, 젊은이들 기회가 많다고 말했다. 굳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성공 공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로컬의 진화>에서는 지역정착사업의 최종 목표가 단순한 지역의 지위 격상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과거 성장 방식의 한계가 뚜렷해지는 시대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다. 삶기술학교는 올해 처음으로 정착사업을 유료 모델로 전환했다. 지난 2년간 국가로부터 받던 재정지원도 없다. 김 공동체장 어깨에는 지역정착사업의 지속성을 이제 수치로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걸려있다. 그는 도시생활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에 "수치로만 성과를 입증 해야했던 도시보다, 수치가 아닌 새로운 가치의 성과에 가능성이 있는 한산에서 잘 정착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역∙농업이슈]와 [농촌불패]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려고 개설한 [지역농촌문제세미나]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의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편집 : 남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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