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

유혈참극을 블랙 코미디로 비튼 영화

1969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희대의 연쇄 살인마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천재 감독 로만 폴란스키 집에 침입한다. 폴란스키는 영화 일로 런던 여행 중이라 화를 면하지만, 아내이자 26세의 배우인 샤론 테이트와 뱃속의 아기는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2019년 할리우드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폴란스키 가 살인 사건’을 재조명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다. 작년 아카데미 상 유력 후보였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밀리고 만 영화다. 가감 없는 폭력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던지는 타란티노는 이 끔찍한 살인 사건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 2019년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9번째 장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맨슨 패밀리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 소니픽쳐스

히피 운동은 현실도피에 불과하다

영화의 시대 배경인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는 불안했다. 베트남전쟁과 냉전 상황에서 청년들은 사회를 곱게 바라볼 리 없었다. 기존 사회 규범을 부정하고 인간성을 찾아가는 히피 운동이 성행했다. 이상적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배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들은 대안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었을 뿐이다. 히피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사실상 히피족의 와해 선언이었다. 이후 부모들은 ‘여전히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적힌 피켓을 들었고, 그들은 순순히 승복했다. 타란티노는 히피들의 이중성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이 아닌, 회피일 뿐이라는 감독의 시선은 영화 곳곳에 묻어있다.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조연을 전전하는 왕년의 스타다. 영화 제작자 마빈 슈워즈(알 파치노)는 달튼에게 이탈리아 서부극 출연을 제의한다. 달튼의 영화 몇 편을 보고 왔다면서 <맥클러스키의 열네 개 주먹>을 언급한다. 나치 장교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달튼도 화염방사기가 무서워 3주간 연습했다고 맞장구친다. 나치 장교를 향하던 화염방사기는 이후 찰스 맨슨의 추종자인 새디를 향한다. 나치와 살인마를 동일 선상에 둔 것이다.

▲ 작중 릭 달튼이 출연한 영화 <맥클러스키의 열네 개 주먹>에서 나치를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장면과 찰스 맨슨의 추종자 새디를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장면이 유사하다. © 소니픽쳐스

히피인 새디는 살인을 모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아이들에게 살인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기들은 호사를 누린다고 비난한다. 또 다른 히피 푸시캣은 배우들이 가짜라고 말한다. 베트남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는데, TV에서 배우들은 살인을 연기한다며 비꼰다. 언뜻 보면 대중문화의 이면을 고발하는 그들의 궤변은 꽤 그럴듯해 보인다. 문제는 이를 빌미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TV를 보면서 자랐다면 살인을 보면서 자란 거야. <왈가닥 루시>를 빼고는 모두 살인 얘기였어. 그러니까 우리에게 살인을 가르친 놈들을 죽이는 거야.”

감독은 이들의 궤변을 모순으로 전환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과거 TV 세트장으로 쓰이던 스판의 농장에 모여 산다. 눈이 보이지 않는 세트장 주인 스판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유와 평화를 이야기한다. 더욱이 이들은 방에서 TV를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들이 늘어놓는 ‘말’과 관객이 보는 ‘영상’을 모순되게 배치하면서 '너희가 틀렸어'라고 통쾌하게 꾸짖는다.

▲ 작중에서 히피들은 TV에서 살인을 배웠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TV를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 소니픽쳐스

두 남자를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

릭 달튼은 한때 헐리우드 서부극 영화 스타였다. 1960년대 후반 서부영화 시대가 저물면서 릭 달튼의 경력도 쇠퇴했다. 그의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는 아내를 죽였다는 풍문에 휩싸여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한다. 그들에게 전쟁이니 히피니 하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다. 각자 앞날을 걱정하기 바쁘다. 관객의 시점은 위태로운 두 남자의 삶을 따라간다. 이런 관찰자 시점은 특히 자동차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클리프 부스가 모는 자동차 이동 장면에서 감독은 항상 내부의 공간감을 드러내는 구도를 활용한다. 뒷좌석에서 바라보거나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구도로 두 사람의 일상적인 대화를 지켜본다. 광각렌즈를 활용한 넓은 화각도 특징이다. 관객은 그들과 동승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대화가 끝나도 커트가 끝나지 않고 롱테이크를 유지한다. 자동차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부감 구도로 커트를 이어간다. 감독이 커트를 구성한 의도에 따라 관객들은 은연중에 그들의 삶에 동행하게 된다. 멀리서 바라보는 할리우드 스타의 화려한 삶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 자동차 내부의 공간을 모두 관망할 수 있는 넓은 화각과 바로 옆 또는 뒤에서 지켜보는 구도, 그리고 롱테이크 커트가 특징이다. © 소니픽쳐스

릭 달튼은 자기 가치를 드러내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대사를 까먹어 망신을 당한다. 은근히 신경 쓰던 주연 배우 앞에서 체면을 구긴 릭 달튼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스스로 질책한다. 이 영화는 촬영 중 실수를 하고 돌아와서 분노하는 모습까지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맥락에 따라 필요한 장면만 가공하는 영화가 아니라, 마치 KBS <인간극장>을 보는 듯하다. 수많은 스태프가 모여있는 촬영 현장에서 대사를 까먹는 릭 달튼에게 화면 밖에 있는 감독은 괜찮다며 계속하라고 소리친다. 다른 스태프도 대사를 읊어준다. 카메라는 배우를 따라 서서히 움직이지만, 스태프는 단 한 명도 화면에 걸리지 않는다. 오로지 소리로만 소통한다. 관찰자의 몰입을 깨지 않으면서도 릭 달튼의 절망을 극대화하는 치밀한 연출이다.

▲ 영화 촬영 현장에서 대사를 까먹고 화면 밖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장면이나 방으로 들어와 홀로 자책하는 장면을 철저한 관찰자 시점으로 표현했다. © 소니픽쳐스

두 남자에게는 공통분모가 있다. 릭 달튼은 자기 경력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클리프 부스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스턴트맨이라는 직업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두 사람은 자기가 쓸모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릭 달튼은 낙마 사고로 직업을 잃은 B급 서부 소설의 주인공에 자기를 투사하며 눈물까지 흘린다. 조연으로 근근이 경력을 이어가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수염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옆집에 이사 온 천재 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친해져서 그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다. 마지막 희망은 그들의 바람대로 흘러갈까?

가십의 대상에서 꿈이 가득했던 배우로

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영화는 할리우드를 향한 러브레터예요”라고 말했다. 1960년대 할리우드의 시각적 재현에 관한 칭송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샤론 테이트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그동안 샤론 테이트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로만 언급됐다. 찰스 맨슨이라는 희대의 살인마와 불행하게 엮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가십의 대상이 됐다. 타란티노의 러브레터는 가라앉아 있던 가십의 대상을 꿈이 가득했던 배우로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 영화에서 샤론 테이트는 천진하고 꿈 많은 배우로 그려진다. © 소니픽쳐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1960년대 할리우드 분위기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다. 세트와 의상, 자동차 같은 소품 말고 작중에서 보이는 릭 달튼 주연 영화도 대부분 실제 전설적인 영화를 오마주한 것이다. 릭 달튼이 나치를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맥클러스키의 열네 개 주먹>은 로저 코먼 감독의 <침략 전선>을 모티브로 한다. 스티브 맥퀸 주연의 <대탈주>는 릭 달튼이 대신 연기하는 상상 장면으로 등장한다.

영화 안에서 다른 영화를 소개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흑백 필름의 질감을 살리고, 서부영화를 표현하기 위해 60년대 영화 특유의 황토색 톤을 살리기도 한다. 영화 초반에 제작자인 마빈 슈워즈가 16mm 필름 <바운티>와 35mm 필름 <태너>를 봤다고 말한다. 화면비는 매체의 성격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현대 영화의 시네마스코프(2.39:1) 스크린 위에 4:3 또는 3:2 화면비 영상을 그대로 올린다. 4:3 비율의 TV를 그대로 촬영한 장면도 있다. 모두 전설적인 영화에 존경을 표시하는 감독의 오마주다. 작중에서 릭 달튼, 즉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직접 연기한다.

▲ 필름 영화 특유의 질감을 살리거나 화면비의 변화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옛날 영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 소니픽쳐스

작중에서 보이는 과거 영상은 모두 새롭게 촬영한 것이지만, 샤론 테이트의 유작 <렉킹 크루>만은 원본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크린에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감동적이다. 샤론 테이트는 남편의 생일 선물을 사러 나왔다가 우연히 극장에 걸린 자기 영화 포스터를 발견한다. 즉흥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기로 한 그녀는 매표소에 가서 자기가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힌다. 매표소 직원의 사진 촬영 요청도 흔쾌히 받아들이며 기분 좋게 극장으로 입장한다. 스크린에서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샤론 테이트는 주변 관객의 반응을 살피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영화에서 릭과 클리프가 나오는 장면, 그리고 샤론 테이트가 나오는 장면은 마치 다른 영화를 섞어놓은 것 같다. 릭과 클리프가 등장하는 장면이 역동적이고 처절한 블랙 코미디라면 샤론 테이트의 그것은 연인의 로맨스다. 제한된 카메라 움직임, 한 사람만 바라보는 구도, 따뜻한 조명 톤, 모든 것이 샤론 테이트만을 위해 설계됐다. 특별히 그녀의 유작만 원본으로 배치한 것은 감독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모다. 많은 관객이 그녀의 진짜 모습을 기억하게 하려는 감독의 장치다. 타란티노의 애정 어린 추모가 가십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한 배우를 구원했다.

불안을 쾌감으로 바꾸는 역사 비틀기

역설적이게도 샤론 테이트가 아름답게 그려질수록 관객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렇게 천진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고?' 관객은 그녀가 겪은 참담한 살인 사건을 이미 알고 있다. 더구나 타란티노 특유의 피 튀기는 액션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그가 이 사건을 다뤄도 괜찮을까?’ 싶은 도덕적 고민도 들 것이다. 아무리 50년 전 일이지만, 끔찍한 살인 사건을 영화화하는 작업이 괜찮을까?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전개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초반부터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한다. 악인의 악행이 심해지고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관객은 주인공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결국 악인은 주인공 손에 파멸하게 된다. 악인이 악할수록 그의 파멸에서 오는 쾌감은 크다.

이 영화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공식이 뒤틀렸다. 실화가 바탕이라면 관객은 아무 죄 없는 샤론 테이트가 악인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비극만을 보게 될 테니까. 관객들은 샤론 테이트의 비참한 최후를 보기 위해 러닝타임 2시간 41분짜리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감독은 관객의 요구에 응하듯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을 클리프 부스가 있는 릭 달튼의 집으로 보낸다. 클리프 부스의 개가 텍스(오스틴 버틀러)의 사타구니를 물고 늘어지는 순간부터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는 명확해진다. 관객들은 긴장하면서 악의 추종자들을 해치우는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 환각제에 취해 실없이 웃으면서 광인처럼 악인들을 처단하는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 소니픽쳐스

끔찍한 참극이 통쾌한 액션 활극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환각제 때문에 실없이 웃는 클리프 부스의 모습은 감독의 재치 있는 솜씨다. 웃음소리를 내며 악인들을 해치우는 기괴함 때문에 피가 낭자한 심각한 상황은 블랙 코미디로 비틀어진다. 더구나 악의 추종자를 향하는 화염방사기는 공포가 아닌 통쾌함 또는 코믹에 가깝다.

스토리는 릭의 집에 침입한 괴한들을 처치하는 촌극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관객의 시선으로 돌아오면 릭과 클리프는 영웅이다. 영화는 이후의 사건을 상상에 맡겼지만, 그들 바람대로 폴란스키의 영화에 출연할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타란티노는 샤론 테이트만 구원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자책하던 릭과 클리프에게도 최고의 선물을 한 셈이다.


편집 :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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