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코로나 사태’

 
▲ 이정헌 기자

입만 열면 웃음이 사라지는 사이가 노사관계다. 잘살아보자고 모인 자리도 파행으로 끝나기 일쑤다. 노사정위원회는 사회적 합의체로서 정권이 다섯 차례 바뀌고, 12명이 위원장 자리를 거쳐갔지만, 그야말로 노사관계를 정립하는 완전한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나마 합의한 내용도 대개 일방적이거나 추상적이었다.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수용한 노동조합은 교사∙공무원의 단결권을 약속받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무력화했다. 노조가 노사 대화체를 신뢰하지 않는 감정의 골도 이때 패였다. 2004년, 일자리 만들자며 내놓은 협약도 임금인상 요구와 구조조정을 ‘서로 자제하자’는 게 전부였다. 이벤트성으로 모여 앉는 것이라면 자리를 주관하는 데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 코로나 상황에 공감한 노사정 대표가 22년 만에 모두 모여 대화를 시작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시감을 떨쳐낼 수 없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까?

▲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주재하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18일 저녁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노사정 주체들이 참여해 열린 제8차 목요 대화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노사’에게는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없다. 감염병 사태에서 경기 부진의 책임을 따질 수는 없다. 소비는 위축되고 고용은 감소하고 수출은 부진하다. 대응해야 하는 부담이 노사 모두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한 ‘선명성’만 부각한다. 노조의 ‘일자리 지키기’와 기업의 ‘고정 비용 축소’는 함께 달성할 수 없다.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살펴볼 생각도 없다. 네 이익이 내 손실인 상황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노사 모두에게 ‘인내와 절제’를 부탁하며, 시한폭탄 같은 노사 갈등을 일시 봉합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정부는 감염자 동선 확보 등으로 강력한 방역 조처에 나서며 국가는 운명공동체임을 주지시켰다. 반면 노사는 별개 공동체임을 확인했다. 정부가 이들에게 ‘타협과 양보’를 요청하지 않은 것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제로섬 게임에서 제3자가 말하는 양보는 대개 한쪽을 이롭게 한다.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가 ‘노사관계’를 중재하며 자주 사용한 레토릭도 ‘참여와 양보’였다.

노사간 견해 차이가 분명하므로, 협의를 주도하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양측 노사보다 ‘코로나 사태’를 중심에 놓고 정부가 협의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공포가 야기한 경제 위기는 1929년 대공황과 흡사하다. 전세계 소비가 위축된 상황에서 수출 진작은 한계가 명확하다. 치료제는 요원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풍토병이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있는데, 기업에 유동성만 공급하는 것은 장기대책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의 수요를 진작해 시장 회복을 꾀하는 정책 방향이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는 바탕이 돼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에 이어서,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이 그것이다. 직접 고용을 창출하는 대규모 토건사업과 노동조합 결성을 촉진한 ‘와그너 법’을 빼면 1933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과 내용이 거의 판박이다. 당시에는 경기침체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실업률의 절반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소득주도성장과 한국판 뉴딜을 동일선상에서 봐서는 안 된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한계는 유효수요 창출 수단이 ‘최저임금정책’밖에 없었다는 데 있다. 10%를 상회하던 인상률도 2020년 속도조절을 한다며 꺾이고 말았다. 반면 한국판 뉴딜은 디지털 경제 활성화를 한 축으로, 확대 재정을 비롯한 전국민고용보험 확대 등 사회보장정책을 다른 축으로 한다. 기업의 신성장동력을 지원하고, 국민의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는 얘기다.

다만 ‘재정 건전성’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의식한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중장기적 증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딜정책이 없는 대공황을 상상해보자. 당시 골드만삭스 주식 하나를 사면 권총을 덤으로 받았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세간에 돌았다고 한다. 금융자본가와 기층노동자 상관없이 모두에게 엄혹한 시기였다. 그 시절 ‘뉴딜정책’을 추동한 힘은 안정적인 정치 기반과 위기 인식 그리고 정부 신뢰에서 나왔다. 코로나 사태가 그렇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유희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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