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헌신’

▲ 윤상은 기자

“넌 정말 천사야.”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착한 사람에게 이 말을 건넬 때가 많다. 오랫동안 이 말을 들어온 집단이 ‘백의 천사’라 불리는 간호사다. 간호사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인자하게 웃으며 환자에게 헌신하는 이미지로 그려지곤 한다. 

그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진짜 모습이 있다. 그는 병원체계를 혁신한 개혁가이자, 당대 의료통계 전문가였다. 크림전쟁 때 야전병원장으로 일한 나이팅게일은 청결하지 않은 병실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에 주목했다. 그는 오랜 기간 병사들의 사망 원인을 분석한 데이터를 모아 전염병과 영양실조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병원체계를 확립했다. 나이팅게일의 실제 모습은 순수하고 착한 천사보다 직업정신이 넘쳐나는 전문의료인이자 개혁가였다. 

매년 약 1만6천명이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며 간호사가 된다. 2018년 기준으로 간호 면허 소지자는 약 39만 명이다. 이중 절반도 안 되는 43.9%만 병원에서 일한다. 야간 근무가 빈번한 3교대 노동 환경과 과중한 업무량 때문에 일을 그만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계속되면서 간호 인력 수급 문제가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 연일 30도 안팎의 초여름 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10일 오전 서울 양천구 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한 의료진이 오전 근무를 마친 뒤 방호복을 벗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5월 12일 ‘세계 간호사의 날’을 맞아 대한간호협회는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감염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방호복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한 채 일한 사람이 있었고, 오래 일해서 집중력 저하를 호소하거나 탈진하는 사례도 있었다. 전국에서 인력을 보내와도 경력이 부족해 중환자실에 투입하기 어려운 이도 있었다. 수많은 간호사가 고강도 노동을 못 이겨 병원 현장을 떠나자, 고숙련, 고연차 간호사가 부족해지는 악순환을 겪었다. 지금 우리 옆에서 고군분투하는 나이팅게일들에게 ‘백의 천사’로서 무작정 헌신하길 바라기보다, 전문의료인으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노동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2018년 3월 보건복지부는 ‘간호사 근무환경 및 처우 개선대책’을 발표했다. 2022년까지 신규 간호사 10만명을 확충해 업무 부담을 완화한다는 내용이 주요 대책이었다. 신규 간호사를 재가 될 때까지 태우듯이 괴롭히는 ‘태움’과 성폭력 등에는 면허 자격정지로 대응하겠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간호 인력 수급 문제가 반복되는 원인을 제대로 짚지 못한 처사다. 일이 힘들어 옷을 벗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간호 인력을 늘려 봤자 장롱으로 들어가는 전문직 면허만 늘어날 뿐이다. ‘태움’ 같은 인권 침해에 강력히 대응하면서도 그 문제가 나온 배경부터 개선해야 한다. 간호 업무 외에 서류작업, 중환자실 관리를 위한 온갖 잡일, 감정 노동 등 너무 많은 일을 간호사에게 맡기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간호사들은 일에 치여 제대로 자지 못하고, 끼니를 거르다가 몸도 마음도 상했다고 말한다. 

얼마전 궁금했던 고교 동창 2명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들은 간호학과에 진학해 졸업 후 바로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투입됐다. 4년이 흐른 지금 한 명은 약한 노동강도를 찾아 규모가 훨씬 작은 병원으로 이직했다. 다른 한 명은 국내 간호사 면허를 활용해 미국이나 호주 등 외국에서 일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작년에 우리나라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아랍에미리트로 건너간 간호사를 서면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와 달리 그곳에서는 서류작업과 전화응대, 물품관리 업무를 맡지 않아도 돼서 간호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일한 아랍에미리트 병원 중환자실 환자와 간호사 비율은 1:1에서 1:2 정도라고 했다. 가끔 대부호들이 데려오는 개인 간호사와 신경전을 벌일 때 빼고 노동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간호사들을 떠나보내야 할까? 코로나19 사태로 ‘K-방역’과 함께 ‘K-의료’가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에도 간호사들이 헌신적으로 의료 현장을 떠받친 덕분일 것이다.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 가능할 수는 없다. 


편집 : 방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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