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선량한 차별주의자’ 저자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

“우리는 차별하는 건 잘 모르지만 차별받는 건 압니다. ‘지방 출신이니까 더 노력해야 돼’ ‘여자니까 더 노력해야지’ ‘배운 게 이거밖에 없으니 노력해야 돼’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면서 삶을 고단하게 보낸 경험이 있다면, 그건 부정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 피해자에게 ‘너 왜 맞아? 맞지 않도록 노력해야지’가 아니라 ‘때리는 사람이 잘못이야’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처럼 차별도 마찬가지예요. ‘차별받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돼’가 아니라 ‘차별하지 말아야지’가 정의로운 일입니다.”

28일 오후 7시 인천 연수구 연수청학도서관 지하 1층 공연장에서 김지혜(45)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가 ‘한 곳에만 머무를 수 없는 우리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소수자·인권·차별을 연구하면서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펴낸 김 교수는 청중 40여명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혐오표현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펼쳐갔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성별, 나이, 인종, 직업, 학력, 장애, 종교, 성적지향, 가족상황 등에 따라 차별을 받기도 하고 차별을 하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정치인들 무신경한 발언에 소수자 상처

▲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하고 있는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 ⓒ 윤종훈

김 교수는 먼저 모범이 돼야 할 선출직 공직자들이 차별·혐오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실제로 지난 5월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에서 열린 다문화가족 행사에서 정헌율(61) 익산시장은 이주민 자녀들을 두고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잡종강세’라는 말도 있지 않냐”고 말해 빈축을 샀다. ‘잡종’이란 표현은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면서 혼혈인을 비하하는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해찬(67)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12월 더불어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서 “정치권에서 말하는 걸 보면 저게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들이 많다”고 말해 물의를 일으켰다. 장애인을 비하한 발언이라고 관련단체들이 반발하자 이 대표는 “장애인 여러분을 폄하할 의도는 없었다”고 사과했다. 이영우(74) 전 경북도교육감은 지난 2017년 7월 경북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초·중·고 1급 정교사 자격연수’에서 ‘여교사는 최고의 신붓감’ ‘처녀 여자 교사들 값이 높다’고 말했다가 반발을 샀다. 여교사들을 ‘결혼 시장에서 팔리는 객체’로 취급해 자긍심에 상처를 주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말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서 “정치권에 정신장애인이 많다”고 말했다가 ‘장애인 비하’라는 반발을 샀다. ⓒ KBS 뉴스

인권과 차별을 연구하는 자신도 ‘결정장애’ 거론

김 교수는 정치인들의 혐오발언이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3년 전 혐오표현 토론회에서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토론회가 끝나자 참석자 한 명이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토론회 자리에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들이 많았는데 소위 인권전문가라며 발표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평소 ‘장애’라는 말을 ‘부족하고 열등하다’는 개념으로 썼기 때문에 그런 발언이 나왔을 것이라는 게 장애인인권전문가의 해석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소수자 연구를 하면서 인터넷에서 수집했던 각종 혐오표현들도 소개했다. 그는 흑인을 가리키는 ‘흑형’에 대해서도 색깔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뿐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당사자들은 무례하게 느낄 수 있는 언행이라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짱깨(중국인)나 왜놈(일본인), 맘충(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 틀딱충(노인), 지잡대(지방대) 같은 비하 발언 역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차이에 따라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김지혜 교수가 지난 7월 발간한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평범한 사람들이 놓치고 있던 차별과 혐오의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창비

김 교수는 차별이나 혐오표현을 없애려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요즘 논란이 되는 노키즈존(어린이 동반을 금지하는 장소)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것인데, 아동을 중요한 손님이라고 생각한다면 놀이기구나 메뉴는 무엇을 준비할지 고민할 것”이라며 “누군가를 포함하려면 생각의 전환이나 연구가 필요하고 돈이 든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차별금지법을 통해 평등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 정책적으로 개발하고 연구하고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별금지법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정부 입법으로 발의됐으나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김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보수 기독교계가 차별 철폐라는 목적 자체를 부정하고 법 제정을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수자와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차별 줄어

▲ 조혜진씨 등 청중은 김지혜 교수의 강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뒤 일상에서 차별과 혐오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했다. ⓒ 윤종훈

김 교수는 질의응답 시간에 “나도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던 것 같다”는 조혜진(43·인천 연수구)씨 이야기를 듣고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차별을 안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최소한 내가 차별할 수 있겠다고 마음을 열어놓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소수자가 얘기할 때 우리는 별로 안 듣는 경향이 있는데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귀 기울여 듣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애인 차별을 안 하고 싶은데 어떡해야 하는지 물어보시는데요, 그걸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환경은 장애인과 어렸을 때 친구 하면서 싸우고, 직장 같이 다니고 그런 거거든요. 성소수자들이 내 옆에 있고요. 남녀가 같이 살고 다양한 지역의 사람과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경험할 수 있는 폭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지금까지는 많이 분리된 사회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덜 분리하면서 소수자들을 차별하지 않는 방향으로 학교나 직장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편집 : 이정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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