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시민교양대학] ‘미술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미술은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표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미술 작품은 현실을 어떠한 정책이나 어떠한 문헌보다도 한 방에, 한 번에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 박영택 교수는 “현대미술은 미술이 무엇인가 질문하고, 삶에서 느낀 다양한 것들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 이자영

16일 제천의병도서관에서 열린 ‘시민교양대학’에서 박영태 경기대 교수는 ‘미술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미술의 포괄적인 개념부터 현대미술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박 교수는 미술작품이 포착한 이미지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읽어나갔다.

▲ 임응식 <구직> 1953. ⓒ 박영택

박 교수는 임응식의 1953년 작품 <구직>을 보여주며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구직(求職)’이라고 쓴 종이를 고무줄로 허리에 질끈 묶은 젊은이의 초상. 사진에서 청년은 축 처진 어깨로 힘겹게 벽에 기대 서있다. 양복을 빼입은 사람들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 뒤쪽 모습과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 사진은 한국전쟁 이후 명동을 묘사한 어떤 문헌보다 현실을 잘 보여준다.

서민을 처음 보여준 화가, 정현웅

정현웅 화백은 1920년대부터 서양화가로 활동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작가다. 흔히 우리는 '서양의 그림'이라고 하면, 정물, 풍경, 누드 등을 떠올린다. 일제강점기 작가들도 '서양의 그림'을 따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 교수는 “식민시대 작가들이 여인들, 정물화 등 일본에서 넘어온 서양식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해 정현웅 화백은 서민들의 삶을 그렸다”고 말했다.

▲ 정현웅 <대합실 한 구석> 1940, 캔버스에 유채. ⓒ 박영택

정현웅 작가의 <대합실 한 구석>은 일제강점기 서민들이 조용히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정물화나 여인들을 그린 작품과는 다르다. 가족들은 대합실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박 교수는 “정현웅은 처음으로 다양하고 무료하고 힘들어 보이는 서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그림을 두고 '살 길을 잃고 만주로 떠나야 했던 유랑민의 고달픈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정현웅 <고가제독> 1944. ⓒ 박영택

서민의 삶을 그리던 정현웅은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이전과는 다른 그림도 그린다. 1944년 작 <고가제독>은 일본인 장군이 함대에서 시찰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를 기원하는, 친일적 요소가 다분한 그림이다.

박 교수는 “1940년대가 되면 많은 조선인 화가들이 전쟁을 독려하고 참여하거나 승리를 기원하는 선전선동 그림을 그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아는 유명한 작가들도 많이 있다, 김기창 화백이라든가, 어두운 우리 사회의 한 페이지”라고 덧붙였다.

전후세대 아픔을 보여준 작가, 박수근

1950~60년대 한국 미술계는 아무도 박수근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독학으로 공부해 화가가 된 박수근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박수근이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는다. 박 교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수근은 어렸을 때 하도 가난했기 때문에,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보통 화가들이 쓰는 전형적인 소재가 있어요. 누드, 정물, 풍경 같은 거죠. 그런데 박수근은 한 번도 그런 걸 그리지 않았어요. 자신이 관찰한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죠.”

▲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58, 캔버스에 유채 ⓒ 박영택

박 교수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한 방에 1950~60년대 한국이 얼마나 빈한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수근의 <앉아있는 여인>을 보여주면서, “이 그림은 그 어떤 논문보다, 그 어떤 책보다 50년대 한국사회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 가정에는 남성이 부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쟁통에 죽거나 행방불명되고,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엄마 혼자 남았으니 억척같이 삶을 버텨야 합니다.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당시에 얼마나 있었을까요. 행상 말고는 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애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업고 왔는데, 아이는 포대기 안이 답답한지 까치발을 들고 서있습니다. 날카롭게 그 장면을 포착한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들을 주로 그렸던 박수근은 본인도 평생 가난했다. 박 교수는 “'반도화랑'의 주인 이대원만이 박수근의 그림을 인정하고 자신의 가게에서 팔 수 있게 해줬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박수근의 작품 중에는 작은 그림이 많다. 미군들이 기념품으로 사 가기 좋도록 작게 그렸다. 그렇게 어쩌다 그림이 하나 팔리면 빈 쌀독을 채우기 바빴다”고 덧붙였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던 박수근의 그림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비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이 됐다. 박수근의 <빨래터>는 45억2000만원에 팔렸다. 박수근의 그림은 호당(엽서 하나정도의 크기) 3억원 수준에 거래된다. 작품에 따라 다르지만 근현대 화가 중에서는 대체로 김환기 다음 가는 비싼 값에 팔린다.

단 한 번에 보여주는 농촌의 현실

농촌을 다룬 미술작품들은 농민과 농촌의 현실을 여실히, 한 방에 드러낸다. 농촌이 해체되어 온 현실, 농부의 고단함, 도시화의 역사 등은 그림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이종구 <김씨 부부> 1994, 한지에 아크릴릭. ⓒ 박영택

박 교수는 이종구 작가의 <김씨 부부> 그림에 농부의 삶이 모두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부부는 이종구 작가의 바로 옆집에 살던 분들인데 오랜만에 이웃집 자식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고 했다. 박 교수는 새카맣게 탄 얼굴과 깊게 패인 주름, 떡진 머리만으로도 농부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인상깊은 것은 오른쪽 아주머니예요. 똑바로 서 계시지를 못합니다. 농촌에서 일하면 허리가 다 굽습니다. 자연에서 먹고살려면 자신의 몸을 굴절시켜야 하니까요. 하루종일 호미질을 하니 허리가 굽을 수밖에 없죠. 머리카락 보시면, 전형적인 시골 파마 스타일입니다. 머리 만질 여유가 없으니 적당히 막 지져놓습니다. 시골 가 보면 다른 아주머니들도 헤어스타일이 딱 저렇죠.”

▲ 임옥상 <이사 가는 사람> 1990, 종이부조 아크릴릭. ⓒ 박영택

박 교수는 다음으로 임옥상 작가의 <이사 가는 사람>을 소개했다. 박 교수는 “서울로 이사가는 가족의 모습”이라고 그림의 내용을 설명했다. 왼쪽의 고급 세단과 오른쪽의 허름한 가재도구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장독대가 있는 걸로 봐서는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모습이다. 농촌이 붕괴되고, 서울로 떠나는 가족의 모습이 차에 실린 짐만으로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장면 보시면, 백미러에 아저씨 얼굴이 비칩니다. 침울해 보이는 표정이죠. 불안하고 불길한 겁니다. 보장된 삶이 아니니까요. 도시에 일자리가 있을 거라 믿고 떠나지만 확신은 없죠. 농촌 빈민이었던 아저씨는 도시에 가도 도시 빈민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자식들은 나처럼 되지 말라며, 몸 대신 정신을 파는 사람이 되라며 교육시키겠죠.”

압축된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

박 교수는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도 이야기했다. 먼저 이야기한 것은 서양 미술과 동양 미술의 차이점이다. 그는 “서양인은 르네상스 이후 '눈에 보이는 외부 세계의 완벽한 재현'을 꿈꾸게 된다”고 했다. 캔버스와 유채 물감이 등장한 것도 그래서였다. 유채 물감을 캔버스에 덧입히며 공을 들일수록 현실과 비슷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반면 동양에서는 그림에 외부 세계를 옮기려는 욕망이 드러나지 않는다. 박 교수는 “동양인은 세계 자체가 재현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림은 그림을 뿐, 세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산수화는 세계 자체를 재현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선으로만 그리고 채색도 간단하다. 명암도, 원근법도 없다.

“그런 문화에 유화, 캔버스가 들어왔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그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식민시대 작가들은 대개 일본에서 넘어온 서양식 그림을 그립니다.”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우리나라에도 그림 감상 문화가 생겨난다. 일본에서 유학한 서양화, 동양화 작가들이 들어와 활동한다. 1920년대가 되면 미술이라는 개념이 보편화하고 장르에 따른 작가 개념도 생긴다. 미술계가 생기고 학교에서는 미술수업이 생긴다. 전람회가 생기고 신문에는 미술기사가 실린다. 비평이라는 개념도 자리잡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자리잡힌 자본주의의 실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1940년대가 되면 많은 조선인 화가들이 일제의 선전선동에 동원된다.

해방 이후 북한의 미술은 선전선동의 도구가 된다. 모든 회화나 조각은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김일성, 김정일 장군을 숭배하는 당의 선전물을 그린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반공이데올로기와 냉전체제로 자유로운 표현이 제한되는 현실에 부딪힌 작가들은 사회현실보다는 풍경, 정물, 누드를 그리게 된다.

대신 등장한 것이 추상화다. 박 교수는 추상화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추상화에는 대개 내면세계, 자아, 심리, 정신과 같은 제목이 붙는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뭘 그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게 추상미술”이라고도 덧붙였다.

80년대 들어서야 작가들은 추상에서 벗어난다. 80년 5.18 민주화운동 이후에는 드디어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도 생겨난다. 박 교수는 “우리 역사를 현실에 적극적으로 표상하려는 시도가 이 시기에 들어서 적극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한국 미술계가 형성됐다.


편집 : 윤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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