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말’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보면 계층에 따라 쓸 수 있는 ‘말’이 다르다. 음성학자인 히긴스는 하류계층 여인 일라이자를 상류계층 귀부인으로 만드는 실험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히긴스는 일라이자를 사교계의 꽃으로 만든다. 이는 일라이자가 입는 옷, 뿌리는 향수, 걷는 모양새 등 외적 요소를 바꿔서 이룬 게 아니다. 하류계층이 가진 말투와 표현, 쓰지도 듣지도 못한 상류계층이 쓰는 ‘말’을 교육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일라이자는 상류층 말을 씀으로써 그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셈이다.
말에는 특정 계층의 욕망과 권력 구조가 작동한다. 어떤 발음을 구사하는지,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지, 사용하는 단어의 수준이 높은지, 단어량이 풍부한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계층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영국 영어를 보면 아직도 과거 계층간 대립이 남아있다. ‘워터’(Water)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T가 강조되는 영국 영어는 ‘상류층 영어’(Posh English)다. 실제로 영국에서 2~3% 정도만 구사한다는 상류층 영어는 그들끼리 5초만 대화하면 바로 그 사람의 출신이나 학력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서민 계층은 미국 영어처럼 T를 정확히 발음하지 않는다. 이런 구분 짓기는 계층을 쉽게 나누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기 쉽게 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말도 남녀간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 남성은 부인을 “내 와이프” 또는 “여편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내”라고 부르는 이는 드물다. 반대로 여성이 남편을 다른 말로 부를 수 있는 단어는 찾기 힘들다. 주목할 사실은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대부분 그들의 성이나 육체와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더러움, 동물성, 악 등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오랜 여성 억압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말과 침묵으로 구성되는 대화에서도 남성은 말을 하는 자, 여성은 침묵하고 남성의 말을 경청하는 자로 인지되는 것 역시 남녀간 권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권력 관계가 녹아 있는 말은 힘없는 자를 은밀하게 옭아매서 문제다. 예컨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재판에서 재판부가 피해자를 신문하면서 ‘정조’라는 단어까지 거론한 건 이를 잘 보여준다. 보이지 않게 여성인 피해자에게 “당신은 지켜야 할 걸 못 지켰다”고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대체 당신의 정조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왜 거기서 그냥 가만히 있었느냐”는 말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 구조에서 위쪽에 속하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조’라는 단어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어떠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위력이 담겨 있다. 여성과 남성 관계에서 오랫동안 지배와 순종의 자리에 놓여 있던 여성은 은밀한 위력에 자기도 모르게 그 이데올로기에 스며든다.
언어학자 사피어는 “언어는 우리가 속한 사회‧지위‧문화적 성격에 맞춰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언어적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고 말했다. 말은 그 말을 수용하는 사람의 사고와 가치관도 무의식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안희정이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 속 ‘괘념치 말거라’는 말은 그 무서움을 보여준다. 그 문장 하나로 가해자인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진짜 피해자가 혼란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평소 의심 없이 쓰던 말을 멈추고 그 말에 어떤 권력 구조가 숨어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말을, 우리가 쓰는 말을 낯설게 바라볼 때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편집 : 이정헌 기자
단비뉴스 청년부, 시사현안팀 박동주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