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영화 <기생충>의 세계관

5월 30일 개봉한 영화 <기생충>은 한국사회의 계급 문제를 잘 나타냈다는 평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세계관과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러나 돋보이는 대립각이 그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계급과 계급, 집단과 집단이 대립한다. <설국열차>에서 상류층이 살고 있는 기차의 앞부분과 하류층이 살고 있는 기차의 뒷부분이 대립하고, <옥자>에서는 ‘옥자’와 ‘미자’를 비롯한 비밀 동물보호단체 ALF와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미란도 코퍼레이션’ 일당이 대립한다. 그리고 <기생충>에서는 반지하방에 사는 ‘기태 가족’과 정원이 있는 2층집에 사는 ‘박사장 가족’이 대립한다.

영화를 본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대결구도와 명쾌한 계급 대립이 봉준호 영화의 특징이다. 지난 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봉준호 감독이 영화 제목을 ‘데칼코마니’로 할까 고민했다고 언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설국열차>의 수평선

봉 감독의 최근 영화에서 계급 대립구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치는 ‘선’이다. 영화 <설국열차>의 기차는 긴 수평적 선이다. <설국열차>의 기차에서 사람들은 탑승한 곳과 태어난 곳에 따라 하층과 상층 계급이 결정된다. 뒷칸 사람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지만, 앞칸 사람들은 비싸고 희귀한 스시와 스테이크까지 먹으며 사치를 즐긴다. 불만이 커진 하층민은 지도자 커티스를 필두로 반란을 일으키고, 혁명이 성공할 무렵 기차 창조자 ‘윌포드’를 만난다. 하층민이 기차의 선을 깨부순 것이다.

그러나 커티스는 윌포드로부터 혁명이나 폭동 모두 기차를 유지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충격적인 진실을 듣고 커티스가 선택한 행동은 기차를 폭발시키는 것이었다. 이 대폭발로 두 아이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열차 밖으로 나가며 영화가 끝난다.

▲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 KBS

하층민들은 굵은 수평선으로 이루어진 기차에서 계획도 없이 앞칸을 향해 장애물을 돌파한다. 잠시나마 그 혁명은 성공적이었다. 앞뒤로 길게 펼쳐진 선에 의해 규정된 계급이 커티스라는 새 지도자에 의해 변화를 만들 뻔했다. 그러나 그 선형 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 선을 넘자 모든 세계는 파괴되어 버렸다.

<기생충>의 수직선

살아남은 특수한 사람이 대상인 <설국열차>와 달리, <기생충>은 더 현실적이다. 전형적이고 평범한 가족에게 일어나는 비극이 스토리의 줄거리다. <기생충>에서도 선은 계급 대립을 나타내는 핵심 장치다. 이 영화에서 선은 수직선이다. 계급에 따라 직선의 위와 아래에 분포한다.

하층민인 기태 가족은 낮은 곳에서도 계단을 한참 내려간 반지하에 산다. 만취한 사람이 창문 밖에서 노상 방뇨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집에는 곱등이가 돌아다닌다. 직선의 밑이다. 반면 IT회사 ‘박 사장 집’은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나온다. 지하실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야 정원을 지나 집이 나온다. 침실에 가려면 한 층을 또 올라가야 한다. 직선의 위 아래로 거주 공간이 분리된다.

봉준호가 뉴스룸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 거주 공간의 수직적 선은 ‘얇은 벽들이 미묘하게 겹쳐서’ 만들어진 구조다. 겹쳐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 깨기 힘들다.

<기생충>에서 선은 직접적이다. 가정부 ‘문광’이 ‘연주’를 깨울 때 넘어간 창문이라는 선은 선을 넘은 그녀의 행동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실제로 영화 중반부에서 ‘해고’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박 사장은 끊임없이 ‘선을 넘지 않는 행동’을 강조한다.

영화에 나오는 가족들은 이 선을 충실히 지킨다. 직선 맨 위 존재인 박 사장 가족은 문광 가족이 살고 있는 지하방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기태 가족과 문광 가족은 위로 올라가려는 선을 잡기 위해 서로 싸운다. 기태 가족이 승리하지만, 선을 깨고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홍수 이후 문광의 남편 ‘근세’와 기태는 각자 사정으로 선을 깼고, 그것은 모두에게 비참한 결말로 이어진다. 선이 깨지면서 박 사장도 피해를 봤지만,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건 ‘기주’의 사망을 비롯해 가족이 흩어지게 된 하층민 기태 가족과, 지하에 숨어 살고 있던 문광 가족이다. 선의 침범은 수직선 밑에 있던 하층민들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것도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선에서 시작한 모든 것은 선에 의해 결정되고, 선에 의해 끝난다. <기생충>에서는 그것이 수직의 선이었다.

반복되는 수평적 폭력

프랑스 혁명가 프란츠 파농은 ‘수직적 폭력에 대항할 수 없을 때, 수평적 폭력이 일어난다’고 했다. 봉준호 영화는 파농의 말대로 변화했다. <설국열차>의 커티스를 비롯한 하류층이 윌포드를 비롯한 상류층에게 대항한 것은 수직적 폭력 또는 ‘혁명’이다. 그러나 수직적 폭력을 동원한 혁명은 파멸을 가져왔다. <기생충>에서는 수직적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직선의 맨 밑에서 수직적 폭력에 시달리던 근세는 오히려 박사장에게 ‘리스펙’을 외친다. 기태도 마찬가지다. 근세는 자신과 같은 계급인 기태를 공격한다.

▲ 프랑스 혁명가 프란츠 파농. © University of Warwick

<기생충>에서 일어나는 건 하층민간 ‘수평적 폭력’이다. 박 사장에게 기생해서 살던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서로를 공격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살아남기 위해서다. 문광이 ‘충숙’을 향해 ‘언니’라 부를 때 충숙은 그 호칭을 거절한다. 상황이 뒤바뀌어 충숙이 문광을 ‘동생’이라 부르자, 이때는 문광이 이를 거부한다. 충숙은 살기 위해 튀어나온 문광을 스스럼없이 지하로 밀어버리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올라서려고 수평적 폭력이 난무한다. 두 가족의 공존은, 박 사장 집에 기생충 한 마리가 더 늘어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수직선 맨 밑의 두 가족은 서로에게 수평적 폭력을 가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수직적 혁명의 실패로 일어난 수평적 폭력이 하위계층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실패의 반복을 초래할 뿐임을 보여준다. 윌포드가 말한 것처럼, ‘개개인이 다른 개개인을 죽이는’ 계급사회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오만 가지 생각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영화”라 답변한 봉 감독의 세계관이다.


편집 : 임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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