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존엄사’와 ‘안락사’ 사이

▲ 이연주 PD

아버지는 ‘존엄사’를 선택했다. 연명치료를 거부한 지 일주일.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아버지를 힘들게 하던, 나를 힘들게 하던 호스를 모두 떼냈다. 앙상하게 마른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마저 떼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편안해 보였다.

반년 전, 암 말기이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 말에 아버지는 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돈도 많이 들고, 자신은 살만큼 살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딸 된 도리를 하지 못했다는 나의 욕심에 치료해보자고,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절망과 희망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여든을 나이에 아버지 병수발을 들어야 했고, 나는 병원비를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곧장 병원으로 달려와 어머니와 교대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밤을 보내고 나면 남동생이 아침에 교대하고, 또 교대하고... 병간호는 끝이 없었다. 다행히 아이는 남편과 시댁이 돌봐 주고 있지만, 이제 말을 시작한 아이를 제대로 돌봐 줄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길을 걷다가 펑펑 운 적도 많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치료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의사가 말한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석 달, 그렇게 반년이 지나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약을 투여하면 아버지는 조금 나아지거나 덜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진통제와 수면제 약발이 떨어지면 더 큰 아픔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했다. ‘안락사가 낫다’고 절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부로 죽을 수 없다며,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땐 그 기다림이 죽기 직전까지라는 것을 몰랐다.

▲ 존엄사와 안락사,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도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다. ⓒ pixabay

의사가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그때가 기다림의 끝이었다. 돌아가실 때만큼은 아버지를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을 옭아매던 호스를 모두 제거했다. 가족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먼 지방에 살던 친척들도 아버지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우린 임종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죽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슬프면서 화가 났다. 그렇게 일주일,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왠지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았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다시 행복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생긴 가족들은 잠시 눈을 붙이러 가고 아버지와 나, 둘만 병실에 남았다.

앙상하게 마른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말대로 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고통스럽진 않았을 터인데…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아버지에게 잘해 드리고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 아프다고 할 때 병원에 데려갈 걸, 아이 키운답시고 신경 쓰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이렇게 아버지를 보내야 하는 것도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누워있는 아버지의 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손이 느껴질 때쯤 삐이- 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고통은 끝났다. 일주일 아니 반년이나 더 연장된 고통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냈다.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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