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혐오’와 ‘매혹’ 사이

▲ 조승진 기자

영화를 보고 난 뒤끝이 찜찜했다. 악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마블 시리즈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의 마지막 장면은 악을 상징하는 타노스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마블 영화는 영웅이 악을 무찌르고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한다는 스토리가 반복된다. 뻔한 내용이지만 계속 흥행하는 이유는 아직도 사람들은 ‘권선징악’과 ‘정의’에 목말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실망스러웠던 건 너무 현실다워서다. 현실에서 공평한 정의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착하게 살아서 손해 봤다’는 찜찜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평등하지 못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 다른, 불공평한 세상을 마주한다. 불공평함은 자본이나 신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브루디외는 사회계급에 따라 습득하는 무의식적 행동 양식을 ‘아비투스’라고 했다. 아비투스는 계급적 차별화 교육을 통해 상속되는 문화자본이다.

문제는 아비투스가 폭력으로 작용하는 데 있다. 상류층 행동양식은 모든 사람의 기준점이 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데도 스스로 부족한 존재로 여긴다. 사투리를 쓰는 지방 사람이 자기 말투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그 예다. 브루디외는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 폭력’이라 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지각하지 못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폭력이라 인지하는 상황이다.

▲ 아비투스는 '상징적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 pixabay

강준만 교수는 상징적 폭력을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는지 인식하지도 못한 채 피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행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때린 놈은 ‘때린 줄도 모르고’ 다리 뻗고 자고, 맞은 놈은 ‘맞은 줄도 모르고’ 아파서 잠 못 이루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현대사회는 상징적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을 양산해낸다. 각종 미디어는 ‘갖춰 놓고 살아야 하는 삶’의 표준을 제시한다. 대부분 사람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평범한 정도로만 사는 데도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졌는데, ‘잘’ 사는 기준점은 높아져만 간다. 과거 당연하게 여겼던 취직,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n포 세대’에게 미디어는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은 SNS에서도 나타난다. 타인이 사는 삶과 나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획일화한 ‘좋은 삶’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비교를 내면화한다. 어느 결혼식 주례사에서 비교는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를 줄인 말이라고 했다. 좋은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비참해질 뿐이다.

‘증오범죄’는 비참해진 사람이 교만함을 드러내는 행위다. 최근 일어난 ‘거제 살인 사건’이나 ‘서대문구 홍제동 경비원 폭행 사건’이 그렇다. 거제 사건 피의자는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해왔다”고 했고, 경비원 사건 피의자는 “층간 소음에 고통받아 왔다”고 진술했다. 전자는 직접 자신을 무시한 여자에게 따지지 못했고, 후자는 층간소음을 일으킨 이웃에게 직접 항의하지 못했다. 대신 그 분노를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에게 풀었다.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은 내가 막 대해도 괜찮다는 내면의 교만함을 폭력으로 분출한 것이다.

▲ 증오범죄는 내면의 교만함이 폭력으로 분출된 행위다. ⓒ pixabay

증오범죄를 개인적 일탈로만 볼 수 있을까? 증오범죄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과격하게 표출된 형태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게 당하는 폭력이 당연했던 만큼, 못난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도 합리화한다. 두 사례의 가해자들은 ‘여성’과 ‘경비원’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다른 상황에서 폭력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징적 폭력을 쓸어내기 위해서는 ‘나’대로 살아도 괜찮은 사회여야 한다. 불공정한 세상을 인정하고 비교를 멈춰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국가가 나설 필요가 있다. 국가 정책은 구성원들이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행복한 삶의 기본조건은 돈이다. 국가가 개인소득 보장 정책을 내놔야 하는 이유다. 사회안전망 확충도 중요하지만, 정부는 지금의 경제정책인 ‘소득주도 성장’을 자신 있게 추진해야 한다. 저소득층을 위한 최저임금 인상도 필수다. 이는 ‘헬조선’을 외치며 다른 나라로 떠나는 청년 인재를 붙잡을 방안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 종사자들이 주로 최저임금에 의존하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다.

미디어의 변화도 필요하다. 각종 프로그램은 소비를 부추기고 남과 비교하는 걸 당연시한다. 획일화한 행복의 틀에 맞춰진 사람이 아니라 저마다 개성으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나름대로 행복하다는 믿음, 내 삶을 긍정하는 힘은 비교를 멈출 수 있게 한다.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지 않을 때 증오는 멈춘다.


 편집 : 박지영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