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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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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고인돌 절반은 한반도에…
[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㊲ 청동기 대표적 무덤양식 ‘고인돌’
2019년 04월 09일 (화) 13:07:53 김문환 kimunan2724@hanmail.net

1866년 10월 병인양요 때 큰 피해를 입은 격전지 김포 문수산성에서 강화대교를 건너면 프랑스 군대가 조선왕실 의궤와 고문서 등을 약탈한 규장각 강화서고가 나온다. 이곳은 원래 고려궁궐지다. 1231년 몽골이 침략해 오자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는 항전을 다짐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긴다. 비록 가까운 거리라도 바다를 건너지 않는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한 전략이었다. 지금은 해인사에 가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팔만대장경이 불심으로 피어난 곳도 강화도 선원사라는 절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강화를 짓밟은 청나라 군대에 맞서던 충신들 사당 충렬사, 1871년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초지진, 1876년 일본과 강제개항 조약을 맺은 연무당. 대한민국 역사가 응축된 강화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한민족의 비조 단군이 직접 쌓았다는 마니산 참성단은 강화 문화유산의 맏형이다. 여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고인돌(支石墓·Dolmen)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토요일은 한식(寒食). 조상 묘를 찾는 명절 가운데 하나다. 고인돌은 우리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양식이다. 고인돌의 기원을 찾아 탐방을 떠나 보자.

   
▲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남한 내 가장 큰 탁자식(일명 북방식) 고인돌이다. ⓒ 김문환

국내에서 가장 큰 탁자(북방)식 강화 고인돌 

각종 유적이 밀집한 강화읍에서 하점면 부근리로 가보자. 거대한 돌덩이가 우뚝 솟은 장관에 탐방객 대부분이 혀를 내두른다. 남한에서 탁자식(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크다. 높이는 2.6m지만, 2개의 받침돌(支石·지석) 위에 있는 덮개돌(上石·상석)은 길이 7.1m, 너비 5.5m로 크다. 근처 점골에도 탁자식 고인돌이 자리한다. 덮개돌 길이 4.28m, 너비 3.7m로 조금 작다. 이 두 개 고인돌을 탁자식이라고 부르는데, 탁자식이란 어떤 양식을 가리키는 걸까?  

장소를 내가면 오상리로 옮겨 보자. 부근리에서 봤던 거대한 고인돌과 다른 구조다. 길이 3.7m, 너비 3.35m로 비교적 작은 덮개돌 아래를 보자. 2개의 받침돌만 있는 게 아니라 막음돌 2개가 받침돌 사이 빈틈을 막아 시신이나 부장품 훼손을 막는다. 시신과 부장품을 묻지 않고, 덮개돌과 받침돌 사이 빈 공간 즉 땅 위에 안치하는 양식을 탁자식 혹은 북방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이제 바둑판(남방)식 고인돌을 보러 전북 고창으로 발길을 돌린다.

   
▲ 고창군 고인돌 박물관 앞의 계산리 고인돌. 바둑판식(일명 남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 김문환

국내에서 가장 큰 바둑판(남방)식 고창 고인돌 

선운사와 서정주 생가로 이름 높은 전북 고창군 고창읍 고인돌 박물관 앞에 집채만 한 돌덩이가 반긴다. 길이 6.5m, 너비 3.5m, 두께 3.4m, 무게는 무려 90∼150t이다.

강화에서 보던 탁자식 고인돌의 덮개돌은 평평하고 날렵했지만, 이곳 덮개돌은 육중함 그 자체다. 차이는 또 있다. 탁자식과 달리 4개의 낮은 받침돌로 거대한 덮개돌을 고인다. 바둑판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남방식이라고도 부르는 바둑판식의 가장 큰 특징은 땅 위에 시신을 놓는 탁자식과 달리 땅을 파고 시신을 묻는다.

박물관 앞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 야외 고인돌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작은 내를 건너 산 아래로 마치 검은 야생화가 들판 가득 피어난 듯, 미당이 읊었던 거울 앞의 우아한 국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거대한 돌덩이들이 구릉을 채운다. 매산 마을과 아산면 상갑리 동서 1.5㎞ 일대에 바둑판식 고인돌이 무려 447기나 퍼졌다.

   
▲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 고인돌. 덮개돌과 받침돌, 막음돌이 원형대로 남은 탁자식 고인돌의 전형을 보여준다. ⓒ 김문환

전 세계에서 한반도에 가장 많은 고인돌 

시신을 땅에 묻는 바둑판식 고인돌은 전남 화순 지방 1300여 개를 비롯해 호남지방에 다수 남았다. 바둑판식의 경우 한군데 수십 기씩 몰려 있는 특징을 보인다. 바둑판식의 변형으로 개석식(蓋石式)도 있는데, 이는 시신을 땅에 매장하되, 받침돌 없이 바로 덮개돌로 덮는다. 우리 민족의 강역인 만주와 한반도. 이 가운데 남한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을 합쳐 3만여 기다. 황해도에 집중적으로 남은 것을 포함해 북한의 1만5000여 기를 합치면 한반도에 4만5000여 기다. 권력가의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다. 일반적인 무덤 형식이었다는 의미다. BC 1000년∼BC 1세기 주로 만들어진 고인돌은 우리 고유의 무덤양식인가?

   
▲ 중국 요령성 개주시 이대자 마을 석붕산의 탁자식 고인돌. 동아시아 최대 규모다. ⓒ 김문환

만주의 동아시아 최대 규모 탁자식 고인돌 

강화도와 인접한 황해도에 북방식 고인돌이 많지만, 갈 수 없으니…. 기수를 압록강 넘어 만주로 돌리자. 고구려 500년 수도이던 국내성 자리. 지린(吉林)성 집안의 5세기 장군총 뒤편 부속묘가 눈길을 끈다. 돌을 반듯하게 잘라 적석총을 만들었는데, 그 꼭대기는 넓적한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 고인돌 형태다. 고인돌에서 계단식 적석총으로 변화되는 과도기 모습으로 추정된다. 무대를 요동반도 개주(蓋州)시로 옮겨보자. 고구려가 당나라 침략을 막아내던 개모성 자리다. 고속철도 개주 서(西)역 앞 공안(公安·경찰)이 휴대전화로 친절하게 인터넷을 뒤져 위치를 알려준 덕에 30㎞ 정도 떨어진 고인돌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공안이 잡아준 택시로 40분여 달리자 이대자 마을 ‘석붕산(石棚山) 석붕(石棚)’이라는 안내 표지에 이른다. 붕(棚)은 차양이나 오두막, 석붕은 돌로 만든 작은 집이라는 의미다. 석붕산 고인돌은 일단 장엄하다. 덮개돌 길이가 8.6m, 너비는 넓은 쪽 5.7m, 좁은 쪽 5.1m의 사다리꼴로 동아시아에서 탁자식으로는 가장 크다. 화강암을 매끄럽게 연마한 점도 눈에 띈다.  

흥미로운 대목은 고인돌을 무속신앙지로 활용하는 점이다. 현장에 간 택시기사도 도착하자마자 고인돌 내부에 설치된 신상(神像)에 무릎 꿇고 예를 표하는 게 아닌가. 중국에서 고인돌은 이곳 개주와 근처 해성(海城)을 비롯해 요령성에 분포하고 일부 해안을 따라 남으로 산둥반도와 저장(浙江)성에서 발견된다. 그러니까 서해, 즉 황해(黃海)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 해안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했던 무덤양식이다. 중국 한족 문명과는 거리가 멀다.

   
▲ 흑해연안 크라스노다르 고인돌. BC1800∼BC1500년. 모스크바 역사박물관. ⓒ 김문환

러시아 흑해연안 크라스노다르 탁자식 고인돌 

만주에서 발길을 몽골 울란바토르 고고학 박물관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알마티 박물관으로 가면 판석묘(Slab Grave)로 불리는 진화된 고인돌 형태 무덤 관련 자료를 접할 수 있다. 발길을 서쪽으로 더 옮겨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로 가자. 크렘린 궁전과 붉은 광장이 자리한 심장부에 아름다운 외관의 역사박물관이 우뚝 솟았다. 전시실로 들어가자 이내 눈이 휘둥그레진다. 평평하고 반듯한 사각형의 덮개돌, 그 아래 매끄럽게 다듬은 받침돌의 고인돌이 박물관 2층을 웅장하게 메운다. 고인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침돌 주위를 빙 둘러 지지해주는 돌, 호석(護石)도 보인다. 호석은 집안의 장군총과 태왕릉은 물론, 서울 석촌동 백제 계단식 적석총에도 사용됐다. 적석총이 고인돌에서 발전해 나온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인돌 내부에서 70여 구의 유골이 쏟아졌다. 공동묘지였던 셈이다. 이 고인돌이 원래 있던 곳은 카자흐스탄과 인접한 흑해 동쪽 연안 크라스노다르. 2007년 대홍수로 유실 위기에 놓이자 안전한 보존을 위해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박물관 측은 제작연대를 BC 2000년∼BC 1500년경으로 추정한다. 한반도나 만주의 고인돌보다 오래됐다. 고인돌의 발상지가 흑해일까?

   
▲ 프랑스 대서양 연안 카르나크의 마네 케리오네 고인돌. BC 3500년. ⓒ 김문환

프랑스 대서양 연안 카르나크…고인돌의 기원 

프랑스 대서양 연안으로 가보자.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한반도에서 시작한 고인돌 여정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종착역을 향해 간다. 프랑스 땅에서 대서양으로 툭 삐져나온 지방을 브르타뉴(Bretagne)라고 부른다. 4∼5세기 훈(흉노)족에게 밀린 게르만족 일파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대륙에서 바다 건너 영국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갈 때, 쫓겨난 영국 토박이 켈트족이 거꾸로 바다를 건너 정착한 땅이다. 브리튼(Britain)인이 들어온 곳이라 브르타뉴라고 부른다. 브르타뉴 서쪽 끝 모르비앙 지역에 카르나크(Carnac)라는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 나온다. 브르타뉴 말로 케레크(Kerrec). 돌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다. 무슨 돌이 그리 많아 이런 지명이 생겼을까? 

고인돌(Dolmen). 브르타뉴어로 ‘Dol’은 탁자, ‘Men’은 돌이다. 탁자식 돌이라는 의미다. 카르나크의 마네 케리오네(Mane Kerione) 고인돌은 받침돌을 세우고 덮개돌을 얹은 모습에서 영락없는 강화도 탁자식 고인돌 이미지가 묻어난다. 차이가 있다면 받침석이 줄지어 길게 늘어서고, 그 위 덮개돌도 길게 이어진 점이다. 마치 지붕 덮인 복도 같다. 그래서 통로 무덤(Alle couverte·영어 Gallery grave)이라고도 부른다. 축조 연대가 BC 3500년경이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됐다. 고인돌은 카르나크에서 시작돼 동유럽과 흑해, 중앙아시아, 몽골초원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인도와 베트남의 동남아시아로도 내려간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고인돌이 프랑스에서 건너왔다는 사실과 함께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가까이 우리나라에 몰려 있는 게 흥미롭다.  

카르나크, 신비의 열석…고대 거석문화의 백미 

카르나크를 거석문화의 본고장으로 꼽는 이유는 고인돌 때문만이 아니다. 신비의 열석(列石·Alignments)이 모두의 탄성을 자아낸다. 길이 4㎞에 걸쳐 무려 3000여 개의 거대한 돌이 줄 맞춰 열병식을 치르듯 정렬돼 있다. 유역 면적은 40ha를 넘는다. 크게 메넥(Menec), 케르마리오(Kermario), 케를스캉(Kerlescan) 3개 지구로 나뉜다. 메넥 열석은 100m 너비에 11줄, 1099개의 거석이 1165m나 뻗어 장관을 이룬다. 케르마리오는 100m 너비에 10줄, 1029개 거석이 1200m나 이어진다. 케르마리오 동쪽 케를스캉은 13줄에 555개의 돌이 늘어섰다. 케를스캉의 ‘마니오 사각형(Quadrilatere du Manio)’이라 불리는 39개 사각형 돌무리가 관심을 모은다. 천문관측, 달력, 신앙 등의 용도를 들지만, 정확한 진상을 알려줄 단서는 없다. 이들 열석은 BC 4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구촌 거석(巨石)문화의 원조로 인정받는다. 거석문화는 여기서 바다 건너 영국 스톤헨지, 지중해 몰타, 북아프리카 이집트로 전파된다. 고인돌을 포함한 거석문화에서 보듯 유무형의 문화는 전파로 다른 지역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홍석희 기자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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