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장승구 세명대 교수
주제: 다산 정약용의 자기 치유와 행복관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동양 고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와 맞닿은 고전을 찾다 보니 고전적이면서 치열했던 다산의 철학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다산이 방대한 저서를 남긴 동기라든가 심리에 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특히, 다산이 유배 갔을 때 느꼈을 심리적 트라우마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저의 주요 관심사였죠.”

세명대 교양대학장이기도 한 장승구 교수는 저널리즘스쿨 특강에서 다산 정약용이 주어진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떤 삶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만들어갔는지 설명했다. 그는 “동시대에 본받을 만한 인물이 없을 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벗을 삼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다산의 삶을 통해 오늘의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장 교수는 다산의 고난과 고통을 말하기 앞서 다산의 가문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조선시대는 선비의 사회였고, 홍문관을 ‘옥당’(玉堂)이라 해서 그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며 “다산 가문은 8대에 걸쳐 옥당을 배출한 명문가였다”고 말했다.

다산에게는 뛰어난 형제들과 친인척들이 있었다. <자산어보>를 지은 약전과 천주교 최초회장인 약종은 형제였고, 최초 영세자 이승훈은 자형이었으며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큰형의 사위였다. 장 교수는 “다산 주변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 많았고 친인척들 외에도 성호 이익의 제자들과 교우하면서 서양 학문을 받아들였다”며 다산의 학문적 배경을 설명했다.

▲ 장승구 교수는 지난해 11월 15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기 치유와 행복관’를 주제로 강연했다. ⓒ 최준혁

고독한 나그네의 마음을 달래준 시의 힘

“다산의 삶에서 고난과 고통을 시기별로 나눠보면, 청년기, 사환기, 신유옥사, 유배지의 고통, 그리고 해배 후의 고난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배지에서 느낀 권력 상실의 트라우마와 고립감, 남겨진 가족의 경제적 고통 등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때가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닥쳐 다산이 가장 힘들어한 시기였습니다.”

다산의 청년기 고통은 가난과 과거 낙방이었다. 8대 옥당을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증조부 때부터 벼슬을 못했기 때문에 가난했다. 식량이 없어 여종이 옆집의 호박을 훔쳐 죽을 끓였을 정도였다. 많은 저서를 남긴 박학다식한 다산이었지만 과거에서 여러 번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다산은 자신에게 중요한 순간마다 시를 남겨 후세에 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영욕이 한 글자로 결판이 나서 하늘과 땅 차이로 일생 갈리니 의기 높은 선비는 머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전원에 버려짐을 달게 여겼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그였지만, 이 시기에도 고통은 있었다. 당시 아들 여섯과 딸 셋을 낳았으나, 아들 둘과 딸 하나만이 남았다. 아들 넷과 딸 둘을 잃은 슬픔은 의학의 관심으로 이어져 그의 학문 범위에 영향을 미쳤다.

1801년 다산은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 다산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다산은 유배를 가던 중 부모님 묘소를 지나가게 되는데, 그 참담한 심정을 시로 남겼다.

아버지여 아시나이까 모르시나이까 / 어머님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가문이 금방 다 무너지고 / 죽느냐 사느냐 지금 이렇게 되었어요
이 아들 낳고 부모님 기뻐하시고 / 쉴 새 없이 만지시고 기르셨지요

장기현에 도착한 다산은 또 한 편의 시를 남긴다.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유배를 가게 되니 인생이 덧없다라는 내용이다. 시를 읽어보면 자신을 자탄하며 한계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조한 그 옷차림 바로 너를 속인 것이지 / 십년을 쏘댔지만 피곤 말고 소득이 뭔가
만물을 다 안다면서 대답 못하는 우자이며 / 천인이 이름 알아도 그 뒤에는 훼방인 것을
미인이 흔히 박명하다고 그 기록 안 보았던가 / 백안으로 보는 자는 언제나 친지 쪽이데
뱀 비늘에 매미 날개 게서 뭘 기대하리 / 우스워라 나야말로 철저한 멍청이로세

▲ 2009년 김호석 화백이 그린 정약용 초상화. ⓒ 다산박물관

이후 다산은 장기현에서 남쪽 바다 끝 강진 땅으로 유배지를 옮긴다. 옮긴 배경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있었다. 다산의 큰형 사위였던 황사영은 천주교 박해에 관한 내용을 써서 북경에 보내려다 발각된다. 그 여파로 다산은 한양에 다시 가서 조사를 받는데, 뚜렷한 연결고리가 없어 강진 땅으로 다시 유배를 보낸 것이다. 강진 땅에 도착한 다산은 ‘나그네 신세타령’이라는 시를 남긴다.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이 나를 불어 / 남으로 강진 땅 밥 파는 집까지 밀려왔네
조각산이 바다를 가리고 있는데 / 총총한 대나무로 세월을 삼는구나
장기 때문에 겨울이면 옷은 되레 얇게 입고 / 수심이 하도 많아 밤에 술을 더 마시지
나그네의 유일한 푸접이 되는 것은 / 동백이 설도 전에 꽃이 핀 거라네 

점괘’로 고통 치유하고 지적인 즐거움 향유

“다산이 처음 유배를 갔을 때 가장 열심히 연구한 책이 주역입니다. 주역은 세계 만물과 인간 만사의 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단순히 점괘만 보는 것은 아니죠. 동양 고전 중에서도 어렵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주역> 연구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괴로운 상황이 반전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주역>은 64괘와 386효의 변화로 모든 인간사와 자연세계를 설명한다. 날씨와 사계절이 변하듯 인간사도 길과 흉,고통과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내용이다. 장 교수는 “동양의 선비들이 <주역>을 보고 마음을 달래며 새로운 상황이 오리라는 희망을 가졌는데 다산도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다”며 <주역>을 희망의 고전이라 평가했다.

장 교수는 “다산 자신이 가장 가치있는 업적으로 내세운 것이 <주역사전>인데 애매모호한 단어들의 의미를 완전히 해독해 숨은 의미를 밝혀냈기 때문”이라며 다산이 느꼈을 지적 즐거움에 관해 설명했다. 장 교수의 저서인 <다산, 행복의 기술>에서도 다산이 <주역>연구를 어떻게 여겼는지 드러난다.

“이로써 몸을 닦아 몸에 허물이나 죄악이 없고, 이로써 백성을 다스려 백성들이 이익과 혜택을 입으며, 이로써 처세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이로써 사물을 관찰해 상서로움과 재앙 그리고 화와 복이 오는 것을 착오없이 예견할 수 있는 뒤에야 바야흐로 성인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20년 전 다산을 처음 만난 장승구 교수는 저서 <다산, 행복의 기술>에서 행복의 길을 물었다. ⓒ Yes24 홈페이지

저술과 교육을 통해 구현한 경세의 꿈

“정조가 좀 더 살았더라면 다산은 남인을 대표하는 차세대 정치리더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죽으면서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으니 상실감은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직접 정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같은 책을 지으며 경세가의 꿈을 후세 지도자에게 전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직접 구현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저술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다산에게 저술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경세가의 꿈을 실천해가는 자아실현의 과정이었다. <목민심서>는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펴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그대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된 책이다. <경세유표>는 경세의 포부를 임금에게 전할 기회가 없었기에 후세에 훌륭한 임금이 나타나면 볼 수 있도록 쓴 국가 개혁의 청사진이다. 나중에 다산의 철학은 호남에 널리 퍼져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우회했지만 그의 경세가 상징적으로나마 실현된 것이다.

“다산의 저술 작업에 제자들의 도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유배지에서 지방 아전들의 자식들을 포함해 20여명 제자를 두었죠.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제자들을 길러 훌륭한 시인과 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산은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다산의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로 황상, 이강회, 윤정기, 이청을 들 수 있다. 황상은 제자들 중 최고의 시인으로 <치원유고>라는 저서를 남겼으며, 이강회는 <유암총서>라는 책을 남긴 훌륭한 학자로 성장한다. 다산은 자기 저술에 제자들을 참여시켜 스스로 책을 쓸 수 있게끔 훈련시킨다. 장 교수는 “다산은 학자로서 모습뿐 아니라 소수에 불과한 인재를 잘 길러서 결과물을 만들게 한 훌륭한 교육자로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 전라남도 강진군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사적 107호 다산초당. 정약용이 10여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자들과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긴 곳이다. ⓒ 강진군청

노년이 돼서야 찾은 청복의 즐거움

“다산은 기회가 되는 대로 산천을 유람하면서 심미적 경지에서 행복을 맛보기도 합니다.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청복을 추구한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유배지에 오게 된 과정들은 늘 다산을 괴롭혔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다스리려 해도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보며 혼자 웃으며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다산에 따르면 인간은 선을 즐기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본성에 따라서 살게 된다. 이러한 본성에 따른 삶은 인간 내면의 양심에 만족을 주고 깊은 희열을 가져다 주어서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또한, 다산의 행복관은 궁극적으로 상제를 전제로 한다. 상제의 존재는 현실사회에서 실천을 추동하는 존재로서 의미가 강하다. 다산은 현실의 행복을 열복과 청복으로 구분하고 자연과 전원 속에서 자유로움을 즐기는 청복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는 청복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었다. 그런 심경이 아래 시에 담겨있다.

곡식 있어도 먹을 사람 없는가 하면 / 자식 많은 자는 배고파 걱정이고
높은 벼슬아친 꼭 바보여야 한다면 / 영리한 자는 써먹을 곳이 없지
온갖 복을 다 갖춘 집 적고 / 최고의 길은 늘 쇠퇴하기 마련이야
아비가 인색하면 자식은 방탕하기 쉽고 / 아내가 지혜로우면 사내는 꼭 어리석으며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 꽃이 피면 바람이 망쳐놓지
천지만물이 다 그렇고 그런 것 / 혼자 웃는 걸 아는 사람이 없네

장 교수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완전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다산이 이 시에 암시해놓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좋은 일을 해보고자 노력했으나 반대파들이 시기하고 유배를 보냈다는 원망이 서려있다.

18년 유배생활을 마친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재회하고 부인과 회혼례까지 치르는 장수를 누린다. 거리가 먼 학자들과도 교류하면서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고 전원의 행복을 누렸다. 노년이 되어서야 청복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 다산은 이 부근에 살며 어부들이 고기 잡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 양평군청

다산이 지금까지 존경받는 이유

“실학자로서 다산은 백성의 고통스런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고통을 줄이고 복락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 하나하나가 모두 하늘이 보낸 소중한 하늘의 자식이 아님이 없다고 여겼죠.”

다산은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공공의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개인적으로 불행했지만 공공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다산의 행복이었다. 다산은 유명한 의학자였다. 임금이 아파서 치료하지 못할 때 다산을 부를 정도였다. 그런 의학 지식들을 당시 백성들의 신체적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마과회통>을 펴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마진(홍역)학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다산의 대표 저서로 알려진 <흠흠신서>는 백성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당시 지방행정관리들은 재판을 할 때 형사 지식이 미흡하여 억울하게 판결되는 일이 많았는데, <흠흠신서>를 통해 공정한 재판이 이뤄져 백성들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했다. 그 밖에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대책인 <애민육조>, 토지정의를 위한 전제개혁론를 집필하고, 지금의 과학기술혁신처라 할 수 있는 이용감 설치를 주장했다. 다산은 이를 통해 백성의 행복한 삶을 위한 법과 제도,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업적을 두고 장 교수는 “다산은 개인의 고통을 시대의 고통 치유와 학문적 성취로 승화하고, 백성의 행복을 위해 지식인의 소임을 다하는 데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했다”며 다산의 위대성을 부각했다.

▲ 정약용이 지은 <마과회통>. 홍역 치료 의학서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미있는 삶에서 행복의 길을 묻다

“다산은 40대에 유배를 가서 개인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하늘이 자신에게 학문을 완성하게 하기 위한 기회로 여기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 속에서 가장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며 자신의 고통도 치유하고 삶을 의미있게 만듭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힘든 일을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 속의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여 자신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장 교수의 저서 <다산, 행복의 기술>에는 빅터 프랑클(Viktor E. Frankl)의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이론이 나온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삶에서 겪는 고난도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고난이 아니게 된다고 했다. 장 교수는 강연 말미에 다산이 노년에 지었다는 시를 소개했다. 그의 긍정적이고 낙천적 정신과 행복관이 그를 의미있는 삶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늙은이의 한가지 유쾌한 일은 / 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
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 / 눈 어두운 것 또한 그것이라
흥이 나면 이리저리 생각하고 / 생각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가네
때로 손들과 바둑 두는 일인데 / 반드시 가장 하수와 대국을 하고
강한 상대는 기필코 피하노니 / 힘들지 않는 일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남은 힘이 있기 때문일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운현 이상수 한홍구 정희준 박창식 김필동 장승구 이주헌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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