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로그인 회원가입
2019.6.16 일
> 뉴스 > 칼럼 > 역사인문산책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불러다오”
[역사인문산책] 안중근의 유허를 찾아서
2019년 01월 17일 (목) 20:08:12 최준혁 기자 silim5707@gmail.com
   
▲ 최준혁 기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순국하기 며칠 전 정근, 공근 두 동생을 만나 이 유언을 남긴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부슬비 내리는 여순(뤼순) 감옥에서 서른둘 나이로 산화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하얼빈 역에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5개월 만이다. 올해는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 거사를 단행한 지 110년째다. 최근 우리 광개토대왕함에 접근한 일본 초계기 비행과 일본의 노림수에서 보듯 주권과 안보를 둘러싼 한일 갈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안중근 하얼빈 거사와 미완의 유작 <동양평화론>이 주는 교훈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이유다.

74년째 실현되지 못하는 안중근 유해 봉환

지난 4일 오전, 추위가 한풀 꺾인 날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로 나와 효창운동장을 지나면 공원이 보인다. 북쪽 동산에는 백범 김구의 묘소가 단독으로 자리 잡았다. 그 아래쪽에 묘 4기가 나란히 앉았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묘에 더해 안중근의 가묘가 눈에 들어온다. 1946년 일본에서 봉환, 안장된 3의사 묘와 달리 안중근 의사는 여전히 ‘가묘’ 상태다.

   
▲ 효창공원. 왼쪽부터 안중근 가묘에 이어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가 있다. ⓒ 최준혁

지난해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 유족들과 점심을 함께하며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북한과 공동사업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해방이 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반성의 말을 덧붙였다. 안중근의 고국 안장 꿈은 74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못한 채, 우리 후손에게 과업으로 남았다.

일제 조선신궁 터에 세운 남산 안중근기념관

문대통령 소망대로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안중근 유해 발굴 사업이 성공하기를 기원하며 남산으로 안중근기념관을 찾아 나섰다. 도심 속 쉼터이자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남산에는 근현대사의 아픔이 깃들었다. 일제는 민족정기를 억누르고자 지금 안중근기념관 자리에 일본 국조신과 천황을 숭배하는 조선신궁을 세웠다.

일제시대 일본군 장교로 친일활동을 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조선신궁터에 안중근기념관 건립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 국민성금이 보태져 결실을 맺었다. 2010년 새 단장을 마친 기념관은 고향이 황해도 해주여서 그를 기념할 이렇다 할 시설이 없는 우리 현실에서 그나마 안중근의 정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갈수록 의미가 커져 가는 ‘평화’라는 시대정신을 안 의사의 일생을 통해 짚어본다.

 

 
▲ 남산에 있는 안중근기념관. ⓒ 최준혁
   
▲ 기념관 중앙홀의 안중근 좌상. ⓒ 최준혁

천주교를 만나 평화와 교육사상에 눈뜨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진사 안태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훗날 독립운동 때도 사용했다. 6살 때 황해도 신천으로 이주하면서 진해현감 출신 조부 안인수가 만든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다. 1894년 16살 때 황해도 동학군에 대항하는 신천의려군으로 활약하며 부친의 초청으로 온 당시 동학대장 김구를 만났다.

2년 뒤 동학군한테 빼앗은 군량미 문제로 명동성당에 피신한 부친이 신천으로 돌아오면서 일가 모두 홍석구(J. Wilhelm, 빌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도마(Thomas, 토마스)라는 세례명의 안중근은 깊은 신앙심으로 전도활동에 힘쓰는 한편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천주교 활동은 국제정세를 읽는 눈과 ‘평화’라는 일생의 신념을 길러주는 밑바탕이었다.

가산 정리해 교육사업, 서양에 부정적 인식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안중근은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려고 상해로 떠났다. 그곳에서 동포들과 접촉했으나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하지만, 상해 성당에서 프랑스 곽원량(Le Gac, 르 각) 신부를 만나 나라를 살릴 방책이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에 있다는 사실에 눈뜬다.

1906년 1월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귀국한 안중근은 교육사업을 위해 가산을 정리한 뒤, 돈의학교를 인수하고 삼흥학교도 세웠다. 민족의식 함양과 인재양성이 목표였다. 하지만 대학설립 제안이 문덕효(Mutel, 뮈텔) 주교로부터 전도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며 거부되자, 이후 종교와 별개로 서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싹튼다.

   
▲ 1908년 3월 8일, 안 의사가 블라디보스톡 <해조신문>에 기고한 '인심결합론'을 새긴 비석. 1985년 기념관 앞에 세웠다. ⓒ 최준혁

의병활동, 단지회 결성해 ‘이토 3년내 처단’ 맹세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본격 독립투쟁을 위해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 이범윤, 엄인섭, 김기룡 등과 함께 의병을 창설해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08년 7월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50명을 사살하는 성과도 거뒀다. 이 과정에 붙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만국공법을 근거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석방하는 평화정신을 실천했다.

의병활동이 정체되자 안중근은 1909년 3월 2일 러시아 노브키에프스크에서 11명의 동지들과 왼쪽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을 썼다. 널리 알려진 ‘단지회’ 결성이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 김태훈은 이완용을 척살하기로 결의했다. 만약 3년 안에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결로 국민 앞에 속죄한다는 비범한 각오를 다졌다.

하얼빈에 울린 7발의 총성, 만국에 퍼지다

안중근은 1909년 9월, <원동보>와 <대동공보>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거사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우덕순과 유동하는 채가구역에서 기다리며 이토를 사살한다는 작전을 짰다. 당시만 해도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고 정보도 정확하지 않아, 이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뿐더러 하얼빈 역에 내릴지, 장춘에서 올 때 하얼빈 전 역인 채가구역에 내릴지도 불확실한 상태였다. 이토 사살팀을 둘로 나눈 이유다. 조도선은 러시아어가 서툰 안중근을 위해 현지 안내를 맡았다.

10월 26일 9시경.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코코프체프가 열차로 올라가 25분간 회담을 하고나서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러시아 장교단이 사열하고 이토가 환영하는 일본 민간인들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본 민간인으로 위장한 안중근이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안중근은 이 순간을 <안응칠 역사>에 이렇게 남긴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 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가. ‘저것이 필시 이등 노적일 것이다’하고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3발을 쏜 다음, 생각해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 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뒤 쪽을 향해서 3발을 이어 쏜 뒤에 또 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이토 저격에서 인간 안중근으로 관심 이동

안중근은 처음 3발을 이토에게 명중시켰다. 이어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1발, 비서관 모리타 이지로 1발, 만주철도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 1발을 맞혔다, 불발탄 1발이 더 있었다. 이는 플랫폼에 떨어졌다. 안 의사는 헌병에 총을 내주고는 순순히 붙잡혔다.

러시아를 누르고 세계 신흥 제국이 된 일본의 실력자 이토의 사망 소식은 곧 전 세계에 타전됐다. 처음 많은 언론은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이토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곧 일본에 맞서 항거한 안중근이라는 인물로 관심이 모아졌다. 1907년 이후 해외에 망명한 많은 동포는 이를 계기로 해외 모금운동과 구명운동을 펼쳤다. 국내에서는 많은 이들이 안중근의 사진을 가슴 속에 품고 다니며 독립의지를 불태울 정도였다.

   
▲ 중국 정부가 하얼빈역에 설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 ⓒ 김문환
   
▲ 기념관 내부로 들어가면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플렛폼으로 이어진다. ‘안중근격폐(격살)이등박문사건발생지'라는 문구가 걸려있다. ⓒ 김문환

안중근은 법정에서 하얼빈 거사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국가적인 일이지 개인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그의 정연한 논리는 일본인들조차 감동시켜 적대관계를 넘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하지만, 일제 재판부는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 함께 거사를 준비한 우덕순에게 3년형, 유동하와 조도선에게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안중근 장군으로 불러야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은 끝까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가 쓴 ‘爲國獻身軍人本分 (위국헌신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봉창, 윤봉길, 박정기는 의사다. 하지만, 안중근은 다르다. 안중근의 명칭을 ‘의사’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나 ‘장군‘으로 바꿔 부르는 게 이치에 맞다. 이순신 장군처럼 말이다. 역사적 정당성을 상실한 왕조정부의 허수아비 군대만이 군대는 아니다. 국민 스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만든 군대야 말로 진정한 군대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 군인 신분으로 전쟁에서 적군을 사살한 것이라는 안중근의 절규를 우리는 언제까지 외면해야 하는가?

   
▲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가지를 열거하며 거사 이유를 밝혔다. ⓒ 최준혁

하얼빈의거 110주년이 주는 교훈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여순 감옥으로 이송된 안중근 참모중장. 그는 감옥은 물론 재판 과정에서 거사의 정당성을 밝히며 시종일관 기개를 잃지 않았다. 5개월 수감생활 중 재판을 받으며 두 권의 저서도 남긴다.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은 미완성 유고다. 안중근은 이 책을 통해 동아시아판 EU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 평화를 이루자는 탁월한 구상을 내놨다. 총을 들었지만, 총이 없는 평화 세상을 갈구한 것이다.

   
▲ 안중근이 최후를 마친 여순감옥박물관. ⓒ 김문환
   
▲ 안중근이 5개월간 수감된 옥사. 많은 중국과 한국 탐방객들이 몰린다. ⓒ 김문환
   
▲ 안중근이 최후를 마친 사형장. ⓒ 김문환
   
▲ 안중근 교수형 장소. ⓒ 김문환

한·중·일 삼국의 협력을 통해 평화를 이루자는 안 중근의 구상은 나치 악행을 철저히 반성하는 독일과 달리 과거사에 진솔한 자기성찰을 하지 않은 일본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 교훈을 남긴다. 안개 속을 걷는 듯한 한반도 비핵화의 불확실성 해소도 마찬가지다. 북미 정상회담 전에 중국부터 찾는 북한, 남북 경제협력도 유엔과 미국 눈치를 보는 남한. 두 한민족 국가의 불완전한 독립 현실은 순국 직전 안중근이 남긴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 속 가르침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운다. 자유독립 회복을 갈망하는 안중근 참모중장의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치고 수강생은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취재와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인데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월요일 오후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 : 조현아 PD

     관련기사
· 천등산에는 박달재와 금봉이가 없다
· 건국 1100주년 고려는 ‘포용’으로 통일
· 백성 손에 불타고 일제 손에 시해된 현장
· “어찌 안에서 서로 죽이라 하는가”
· “이북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최준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단비뉴스(http://www.danbi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나누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Follow danbi_news on Twitter

단비뉴스소개기사제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7136)충청북도 제천시 세명로 65(신월동 579)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413호|Tel 043)649-1557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충북 아 00192|발행인: 이봉수|편집인: 김문환|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문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환
Copyright 2009 단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nbi@danb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