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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역사인문산책] 경교장
2018년 12월 25일 (화) 18:27:17 윤종훈 기자 yoonjh2377@gmail.com
   
▲ 윤종훈 기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 <나의 소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중에서)

문화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꾼 백범 김구.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미군 정보부대 소속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 지 69년이 흘렀다.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북 통일운동에 앞장선 백범은 미소 양 강대국의 냉전 구도에 정면으로 맞섰다. 삼팔선을 베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분단을 막겠다며 목숨까지 내놓았다. 백범이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로 활용한 서울 서대문 경교장(京橋莊)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에 어떤 교훈을 던지는가?

친일파가 제공한 김구 선생 숙소, 경교장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오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보인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주범 이기붕 부통령 저택 자리다. 그 옆에 성균관대 부속 강북삼성병원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나온다. 몇 계단 오르면 새물내 물씬 풍기는 높은 병원 건물 앞에 르네상스 양식을 변용한 2층짜리 서양식 건물이 위용을 뽐낸다.

   
▲ 경교장은 1967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매입해 병원 건물로 사용하다 2013년 원형을 복원해 일반에 역사시설로 공개한다. ⓒ 윤종훈

일제시대 금광업자이자 친일파인 최창학이 1938년 건축해 개인저택으로 쓰다 광복 뒤 백범에게 제공한 경교장이다. 지금은 소유주인 삼성병원이 서울시에 의뢰해 백범이 기거하던 1940년대 말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백범의 독립정신과 통일정신을 기리는 탐방객들의 발길이 평일임에도 끊이지 않는다.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이자 반탁·통일운동의 구심점

백범은 1945년 8월 15일 일제 항복 직후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중경에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냈다. ‘임시정부가 최단기간 내에 환국할 것이며, 국내에 들어가 각계 대표들과 과도정권을 세우고, 그 정권에서 정식정부를 수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백범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 1945년 11월 3일 환국 전 중경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백범과 임정 요인들이 사진을 찍었다. ⓒ 윤종훈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1945년 11월 23일 환국했다. 백범은 경교장을 임시정부 청사로 정하고, 국무위원회를 개최하는 등 새로운 조국 건설에 나섰다. 수십여 년 조국을 떠나 국내 거처가 없던 임정요인들은 경교장에서 공동으로 기거했다.

백범이 서거한 2층 침실 서재 창문 총탄 자국 

경교장을 찾는 대부분 탐방객들처럼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민족의 큰 스승 백범이 흉탄에 쓰러진 최후의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최창학이 유럽에서 수입한 최고급 대리석과 원목 장식의 계단을 오르면 2층 중앙에 임정요인들 공동 침실이 나오고 오른쪽이 백범 침실이다. 침실 앞에는 작은 책상이 있다. 여기서 백범은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았다. 2013년 고증을 거쳐 총알이 관통한 창문이 당시 모습대로 복원돼 민족지사의 최후를 증언한다. 가슴이 숙연해진다. 누가 안두희를 사주했을까? 왜 백범을 죽여야 했을까? 백범의 일생을 회고하며 그 의문을 풀어본다.

   
▲ 경교장 2층 백범침실 책상. 의자에 앉아 있다 암살됐다. ⓒ 윤종훈
   
▲ 백범을 관통한 총알 2개가 유리창을 뚫고 나간 당시대로 복원돼 있다. ⓒ 윤종훈

동학·애국계몽운동 펼치다 총독 암살미수 뒤 임시정부 헌신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은 17살이던 1892년 황해도 향시(響試)를 쳤다가 매관매직 풍토에 절망하고 급제의 꿈을 접는다. 이듬해 1893년,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수난에 직면해 동학(東學)에 발을 들여놓는다. 인내천(人乃天), 곧 ‘사람이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에 매료된 거다. 일제의 탄압으로 동학이 실패한 뒤,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변장한 일본군인 스치다를 처단한다.

   
▲ 초대 상해 임시정부 조직도. 이승만이 대통령이고, 백범은 내무총장 산하 경무국장. ⓒ 윤종훈

고종의 특사로 사형에서 감형된 뒤 탈옥해 계룡산 마곡사에서 승복을 입지만 곧 환속해 학교를 설립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친다. 1911년 1월 초대 일본 총독 테라우치 암살 모의로 17년형을 선고받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9년 3.1운동 뒤, 44살 나이로 중국 상해로 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원하며 임시정부 내무총장 산하 경무국장을 맡아 헌신한다.

1932년 윤봉길 의거로 독립운동사 큰 획

좌우분열과 무장 독립투쟁세력의 이탈 등으로 위축된 임시정부를 백범은 끝까지 지켜낸다. 1926년 임시정부 최고 책임자인 국무령이 된 뒤, 1931년 ‘한인애국단’을 결성해 이듬해 1932년 한국 독립운동사의 획을 긋는 쾌거를 일군다. 1월 8일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의 일본국왕 암살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꽃을 피운다.

   
▲ 상해 홍구공원 의거 직전 윤봉길이 백범에게 준 시계의 복제품. ⓒ 윤종훈

상해를 침략해 점령한 일제는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왕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을 겸해 대규모 행사를 연다. 백범의 지시를 받은 윤봉길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지금은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홍구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다. 상해사변 승리의 주역인 일본군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그 자리에서 폭사한다.

   
▲ 백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뒤 1928년부터 직접 쓴 자서전 <백범일지> 친필본. ⓒ 윤종훈

중국인도 못한 쾌거 뒤에 비로소 중국 국민당 정부 장개석은 백범을 면담하고 전폭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한다. 자신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된 일제를 따돌린 백범은 가흥, 장사 등 각지를 돌며 투쟁을 이어간다. 1940년 중국 정부를 따라 중경에 임시정부를 설치하고, 광복군을 결성한 뒤 미국과 손잡고 무장투쟁에도 나선다.

1945년 환국 뒤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 반대운동 

하지만,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로 일제가 갑자기 항복하면서 임시정부 광복군의 미군 합작 국내침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신탁통치 발표 뒤, 12월 31일 반탁시민대회를 연다.

   
▲ 1945년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에서 연설하는 백범. ⓒ 윤종훈

백범은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한다. 아울러 미국, 영국 등 5개 열강에 ‘한국 인민의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승인하라’는 4개항의 요구서를 보내는 등 완전한 자주국가 수립에 온 힘을 쏟는다.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이 수포로 돌아가고, 한국 문제를 넘겨받은 유엔은 자유 총선거에 따른 한국 정부수립을 결정한다.

분단반대 통일운동으로 남북협상 추진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지원 아래 남에서는 이승만, 북에서는 김일성 주도로 남북 분단정부 수립을 향해 나간다. 백범은 ‘분단은 있을 수 없다’면서 남북 협상을 추진한다. 먼저, 1948년 1월 김규식과 미소 양국군대 철수, 남북요인회담과 총선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원칙에 합의한다. 이어 2월 16일 두 사람 명의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 1948년 2월 10일 <한보> 25호에 실린 백범의 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은 남한 단독정부 반대와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역설했다. ⓒ 윤종훈
   
▲ 백범과 김규식이 북한 김두봉에게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한 편지. ⓒ 윤종훈
   
▲ 1948년 북한 내 민족진영 비밀조직원들이 백범, 이승만 두 정치지도자에게 북한 정세를 보고하고,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탄원하는 내용을 담은 속옷 밀서. ⓒ 윤종훈

북측은 3월 25일 ‘남북요인회담’을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로 바꿔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한다. 남한의 중도파와 민족주의 단체들은 적극 찬성 의사를 밝힌 가운데 김구와 김규식이 참석을 결정한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이승만 계열 우파 진영은 김구의 방북을 반대했지만, 김구는 “삼팔선을 베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분단을 막아야 한다”며 북으로 간다.

평양 남북협상, 4개항 합의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남한의 41개 정당과 사회단체, 북한의 15개 정당과 사회단체를 합해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모였다. 조소앙을 비롯한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홍명희 같은 민족주의자들도 대거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19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2일에야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만 하고 퇴장해 버렸다. 김규식은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에 참석하기에 앞서 평양행을 만류하는 학생들에게 경교장 현관 위로 나와 연설하는 백범. ⓒ 윤종훈

형식적인 대규모 회의보다 내실 있는 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주장한 거다. 2명의 민족지사 요구에 결국 북측이 동의해 김일성과 김두봉을 합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회담이 26일과 30일에 열렸다. 4김회담 합의를 거쳐 남북지도자협의회는 4월 30일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채택한다. 여기서 나온 4가지 결정사항은 1) 외국 군대 즉시 동시 철거, 2) 외국군 철수 후에도 내전 일으키지 않는다는 약속, 3)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4) 단선단정 반대와 불인정이다.

주한미군 방첩대(CIC) 소속 안두희 백범 암살 

합의문이 나온 지 10일 만인 1948년 5월 10일 남한은 단독 총선거를 실시해 200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이어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백범은 단정 반대를 내세우며 선거에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 독립지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남한만의 반쪽 선거, 그 남한에서도 다시 반쪽만 참가한 선거를 통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북한은 9월 9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세워 분단을 고착화했다.

   
▲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서거할 당시 백범이 입었던 옷의 혈흔. ⓒ 윤종훈

그리고 1년여 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경교장을 찾아 백범에게 흉탄을 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분단을 막고 통일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백범은 그렇게 쓰러졌다. 안두희는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천수를 누렸다. 그는 대한민국 육군소위이자 주한미군방첩대(CIC) 요원이었다.

백범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

북미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을 비롯한 남북협력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송이버섯과 남한의 귤은 자유롭게 오갔지만, 자주독립국가에서 사람은 자유롭게 오가지 못한다. 백범의 신념은 미국과 소련의 간섭을 배제한 남북협상과 자주독립이었다. 지하에서 백범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싶어 할까? 백범이 평양행을 만류하는 학생들에게 경교장에서 한 연설이 남북의 모든 동포와 지도자들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치고 수강생은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취재와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인데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월요일 오후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 : 임지윤 기자

[윤종훈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윤종훈입니다.
정보를 캐내는 꾼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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