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㉒ 고구려의 수도 ‘평양 풍속사’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단 말이냐?”

조중환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1913년 연재한 ‘장한몽’ 8장 ‘대동강안’의 이별 장면이자 1912년 개성에서 창단된 신파극단 유일단(唯一團)이 1913년 8월 초연한 ‘장한몽(長恨夢)’의 한 장면이다. 강석, 김혜영 등이 코믹하게 패러디한 대사로 더 익숙하다. ‘한스러운 긴 꿈’이란 ‘장한몽’은 일본 작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금색야차(金色夜叉)’ 번안소설이다. ‘야차(夜叉)’는 고약한 악귀이므로 ‘금색야차’는 겉만 번지르르한 악당을 가리킨다. 물신숭배를 비꼰다. 1897년 1월부터 2년간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연재된 이 소설 역시 1884년 사망한 영국 여성작가 샬럿 메리 브레임(C M Brame·필명 Bertha M Clay)의 ‘Weaker than a woman(여성보다 더 약한)’을 번안한 거다. 사랑 대신 돈을 택한 심순애와 배신당한 이수일의 아픔이 밴 곳, 세기를 넘어 애송되는 이별 대사 현장은 평양 대동강 부벽루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중순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김 위원장과 두 번째 만남을 시사하고 있어 9월의 평양은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킬 참이다. 1500년 전 고구려 수도 평양의 가을 풍속도를 들여다본다. 

▲ 새 깃털 조우관을 쓴 고구려 무사 벽화. 남포 쌍영총 출토. ⓒ 국립중앙박물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련, 평양 대동강 변 황금 허리띠 장식

서울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고대 전시실로 가보자. 평양 보통강구역 석암동(구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 고분에서 출토한 황금 유물이 반갑게 손짓한다. 금판에 큰 용 1마리와 작은 용 6마리가 뒤엉킨 역동적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누금(累金) 기법으로 수많은 금 알갱이를 두르고, 비취옥을 상감(象嵌)한 국보 89호 황금 교구(교具·허리띠 버클)다. 북방 초원문화의 상징인 누금상감기법의 교구는 순금 53.9g, 1돈짜리 금반지 14개를 만들고도 남는다. 시기는? 무덤에서 BC 8년 명문이 새겨진 칠 그릇이 나왔다. BC 8년 한나라에서 제작돼 평양 대동강 유역으로 1세기 초쯤 왔을 터이다. 아직 고구려가 만주 집안(集安) 국내성에 머물 때다. 그렇다면 당시 평양의 주인공은?

진시황 사후 항우의 초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차지한 유방의 한(漢)나라는 훈(흉노)과 싸우면서 한족의 영역을 동서남북으로 넓힌다. 7대 무제는 BC 108년 고조선 수도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다. 이론(異論)이 있지만, 왕검성을 평양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평양 대동강 유역에 한나라 문화가 유입되고, 이 일대 무덤 벽화와 유물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심순애의 마음도 홀릴 법한 화려한 허리띠 장식을 찼을 낙랑공주와 대동강 변에서 로맨스를 벌인 고구려 왕자가 있으니….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아들로, 시조 고주몽의 증손자인 호동왕자다. 낙랑공주와 비련 끝에 호동왕자가 자결로 삶을 마감한 것이 32년, 황금 허리띠와 동시대인 1세기 초다. 대동강은 이래저래 연인들의 로맨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이지만…. 

▲ 새 깃털 조우관을 쓴 인물 벽화. 함양시 건현 장회태자묘 출토. 706년. ⓒ 서안 섬서성 박물관

4·27 남북정상회담 전통의장대 관모와 고구려 조우관

지난 4월 27일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펼쳐진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2018 남북정상회담을 돌아보자. 두 정상을 호위한 국군 전통의장대 대원들 머리에 특이한 장식이 보인다. 조선시대 군관복장 관모 위에 새 깃털 2개를 꽂았다. 무슨 근거로 국군 전통의장대 머리 장식에 새 깃털을 꽂은 걸까?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전시실에서 또 한 점의 유물을 보면 의문이 풀린다. 고구려 금동관 장식이다. 아직 고구려 금관이 출토된 적은 없지만, 금동관은 여러 점 나왔다. 그중 만주 집안에서 발굴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금동관은 이마에 두르는 관 테 위에 3개의 새 깃털 세움 장식을 달았다. 새 깃털 장식 금동관은 국립대구박물관에서도 기다린다. 경북 의성 탑리에서 출토한 금동관은 신라의 일반 금동관과 달리 고구려풍의 새 깃털을 원용해 관심을 모은다. 그렇다면 새 깃털 관모 장식이 고구려 풍습이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동강 유역 남포시 쌍영총 벽화 속 새 깃털 관, 조우관(鳥羽冠) 

중국 역사서를 펼치자. 당나라 이연수가 남북조 시대 북조의 선비족 나라 북위, 북제, 북주, 이어 수나라까지 네 나라 역사를 659년 100권(본기 12권, 열전 88권)으로 정리한 ‘북사(北史)’다. 94권 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인들이 고깔(弁·변) 형태의 절풍(折風)을 쓰는데, 사인(士人·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란 뜻)들은 새 깃털로 장식한다고 적는다. 조우관이다. 귀인(貴人)들은 비단으로 만든 고깔에 금장식을 붙이는데 이는 소골(蘇骨)이라는 기록도 덧붙인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대구박물관의 금동관은 소골인 셈이다. 새 깃털, 조우관을 쓴 고구려 인물을 볼 수는 없을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동강 유역인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쌍영총(雙楹塚)에서 1913년 일제가 발굴한 벽화를 전시 중이다. 화살통을 차고, 말 달리는 고구려 무사 머리에 새 깃털 2개가 꽂혔다. 평양 대동강 변은 물론 대륙을 누비던 고구려 무사의 모습을 따 국군 전통의장대 조우관을 만들어 낸 거다. 

▲ 새 깃털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절. 돌궐 궁전 벽화. 651년.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박물관

서안(西安) 당나라 장회태자 무덤벽화 조우관 쓴 인물

고구려 조우관 자취를 찾아 중국 역사고도 서안으로 가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3대 황제 고종과 황후 측천무후는 서안 북서쪽 60여㎞ 지점 함양(咸陽)시 건현(乾縣) 건릉(乾陵)에 묻혔다. 근처에 17개의 배장무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장회태자 이현의 묘다. 고종과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인 이현은 670년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모후의 미움을 사 680년 폐위된 뒤 684년 자결한 비운의 인물이다. 704년 측천무후가 죽고 나서 706년 부모 곁에 배장된 장회태자 묘전시관으로 들어가면 벽화로 가득하다. 그중 예빈도(禮賓圖)가 눈길을 끈다. 서안 섬서성(陝西城) 박물관에 전시 중인 진품에 새 깃털 조우관을 쓴 인물이 보인다. 고구려는 668년 멸망했으니 이현이 장회태자 시절인 670∼680년 조우관을 쓰고 찾아온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신라 역시 고구려 영향으로 깃털 관을 쓴 예가 있어 신라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668년 고구려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당나라는 670년 치소를 신성(新城)과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긴 뒤, 677년 고구려 마지막 보장왕을 조선군왕겸 요동도독,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아 자치권을 준다. 그렇다면 장회태자묘에 등장한 조우관 인물은 고구려 옛 영토의 고구려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국보 89호 황금 허리띠 교구. BC1세기∼1세기. 평양 석암리 9호 출토. ⓒ 국립중앙박물관

우즈벡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 조우관 쓴 고구려 사신 

고구려 조우관 풍습을 찾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보자, BC 328년 전후 알렉산더가 정복해 ‘마르칸트’라는 이름을 붙였던 실크로드 핵심도시 사마르칸트.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이웃하며 당나라에 맞서던 돌궐(투르크) 궁전 유적이 사마르칸트 북쪽 교외 아프라시아브 언덕에 자리한다. 630년 당나라에 멸망당한 동돌궐과 구분해 서돌궐(657년 멸망)로 부르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돌궐 궁정 유적에서 1964년 벽화가 발굴됐다.  

4방향 벽화는 동쪽 인도, 서쪽 돌궐, 남쪽 페르시아, 북쪽 중국이다. 아프라시아브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돌궐벽화(서쪽면)가 눈에 들어온다. 돌궐 왕 바르후만(Varxuman·拂呼慢)이 앉고, 그 밑에 각국 사신이 돌궐 관리와 서 있는 구도다. 이 중 오른쪽 맨 끝에 새 깃털 관을 쓴 2명의 인물이 보인다. 그림은 언제 그려졌을까? 송나라 때 1060년대 문장가 구양수 등이 편찬한 ‘신당서(新唐書)’에 “당 고종 영휘(永徽·650∼655년) 연간에 기(基·돌궐) 땅에 강거도독부(康居都督府)를 설치하고, 기왕(基王·돌궐왕) 불호만을 도독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강거도독부 자리는 석국(石國·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이다. 따라서, 벽화는 650∼655년 그려졌다. 당나라와 국운을 건 대결을 펼치던 연개소문이 645년 서돌궐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로 미뤄 벽화 속 조우관 인물은 평양에서 간 고구려 사절이 분명하다.  

고구려 10월 제천의식 동맹(東盟), 나무로 깎은 수신(隧神·동굴신) 섬겨

이렇게 새 깃털 관 풍습을 지닌 고구려는 매년 10월 제천(祭天)의식 동맹을 개최했다. 이 의식에서 누구를 섬겼을까?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동진이 무너지고 등장한 한족 송(宋·420∼479년)나라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85권 ‘동이열전’ 고구려조를 보자.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隧神 亦以十月迎而祭之(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동맹이다. 나라 동쪽 큰 굴을 동굴신이라고 부른다. 10월에 이 동굴신을 맞아 제사를 지낸다).” 수(隧)는 동굴을 가리킨다. 수신, 즉 동굴신 숭배 풍습을 전해준다. 또 한 권의 역사서를 펼쳐 얘기를 진척시키자. 진(晉)나라 학자 진수가 280∼289년 사이 쓴 위(魏), 오(吳), 촉(蜀) 세 나라 역사책 ‘삼국지(三國志)’ 65권 가운데 ‘위서’ 30권째가 ‘오환선비동이전’이다. 이 중 고구려조에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於神坐(동굴신을 맞아 나라 동쪽 높은 곳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나무를 깎아 만든 동굴신을 신좌에 안치해 모신다)”라고 나온다. 동굴신은 나무로 깎은 목수(木隧), 즉 목신(木神)이었다.  

조우관 쓴 고구려 남성들, 부여신으로 부르는 여신 숭배 풍습  

이제 마지막 퍼즐을 풀자. 이연수의 ‘북사’ 고구려조를 다시 펼친다. 목수, 즉 목신의 실체가 나온다. “又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 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 與朱蒙云(또 신을 모시는 사당 2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으로 나무를 깎은 부인상이다. 다른 하나는 등고신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시조로 부여신의 아들이다. 관직을 설치하고 관리를 보내 수호하는데 아마도 하백녀와 주몽을 가리킨다).” 부여 출신인 시조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을 부여신으로 신격화한 거다. ‘북사’는 당나라가 고구려와 사신을 주고받은 뒤, 숱한 전쟁을 치르던 659년 편찬돼 당시 고구려 사정에 밝은 역사서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424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으니,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들이 여신목상(木像)을 떠받들던 대동강 변 평양의 가을 풍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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