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 풍속문화사] ⑰ 아테네의 탄핵제도 ‘도편추방제’

그리스 수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아래 소크라테스가 거닐었을 판아테나이카 도로를 가로지르면 아고라 끝자락 웅장한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BC 2세기 페르가몬 왕국(터키 서부 해안의 그리스계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세운 스토아(Stoa, 지붕을 갖추고 한쪽이 야외로 트인 복도)다. 1950년대 미국 기술진이 복원한 ‘아탈로스 스토아’는 현재 내부를 ‘아고라 박물관’으로 꾸몄다. 주옥같은 고대 그리스 유물이 탐방객을 맞는다. 그중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쪽 산록 우물에서 출토한 도자기 접시 유물이 관심을 모은다. 접시들에 똑같이 적힌 ‘테미스토클레스(ΘΕΜΙΣΘΟΚΛΕΣ)’. 사람 이름일 텐데… 무슨 사연일까? 우리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국민의 촛불 하야 요구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1심 재판에서 징역 24년을 선고받았다. 임기를 마치기는 했지만, 재임 중 각종 비위 혐의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수감돼 재판 절차를 밟는다. 국민의 지지로 최고 권력에 올랐지만,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전직 대통령들. 현재의 권력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교훈이 엄정할 수밖에 없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도편추방제 문화를 살펴본다.

▲ 그리스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에 보관된 도자기 접시 파편 ‘오스트라콘’ 모음. 탄핵 대상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김문환

◇ 에드거 앨런 포와 바이런이 찬미한 그리스 문명 

아테네 남동쪽 40㎞ 지점 수니온 곶으로 가보자. 쪽빛 하늘과 라피스 라줄리의 코발트 빛 바다가 어울려 붓도 없이 한 폭의 수채화로 피어난 수니온 곶 포세이돈 신전. 가장 그리스적인 이곳에 서면 2명의 문인이 떠오른다. 아테네나 로마 근처에 얼씬거린 적도 없으면서 ‘그리스 로마 문명’에 대해 멋진 문구를 지어낸 미국의 19세기 작가 에드거 앨런 포. 1849년 40세에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기 전 그가 남긴 말. “영광은 그리스의 것이요, 위대함은 로마의 것이다”. 그리스 문명이 영광스럽다고 입으로만 외친 포와 달리 그리스 문명을 위해 온몸을 바친 문인이 있으니, 조지 고든 바이런이다. 포보다 20세 많은 영국의 이 낭만파 시인은 방탕한 아버지에게서 방탕 대신 방랑의 기질을 물려받아 1809년 22세 나이로 스페인, 그리스 등의 지중해 지역을 2년간 돌아본다. 이후 런던의 문단에서 인기를 모으던 이 미남 시인은 여인들의 손길을 뒤로한 채 불편한 오른쪽 다리에 아랑곳없이 1823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던 그리스로 간다. 그리스에 모인 독립군의 사령관으로 호기 좋게 터키에 맞선 것은 좋았는데… 그만 말라리아에 걸려 37세 나이로 ‘덧없는 인생’에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만다. 19세 때 낸 첫 시집 ‘덧없는 시편들’(Fugitive Pieces)의 제목처럼 말이다.  

◇그리스 문명의 핵심은 민주주의(Democracy)=민중(Demos)의 지배(Cracy)

바이런이 그리스에 남긴 자취는 강렬한 지중해 햇빛에 흰색으로 빛나는 포세이돈 신전 도리아 기둥에 어른거린다. 바이런이 기둥에 새긴 글귀는 200여 성상(星霜)을 넘어 지금도 여전하지만, 직접 볼 수는 없다. 유적 보호를 위해 내부 출입을 금지하는 탓이다. 인습에 대한 저항, 날카로운 풍자로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모으던 이방(異邦)의 시인이 목숨까지 바치며 찾고 싶어 했던 그리스 문명의 고갱이는 무엇일까? 바이런이 1811년 찾았던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심장부다. 아테네가 수백여 개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Polis) 가운데 그리스 문명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BC 5세기 이후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인문학, ‘오이디푸스 왕’으로 상징되는 소포클레스 등의 비극문학, 신의 솜씨로 ‘디스코볼로스’(원반 던지는 남자)를 빚어낸 미론 등의 조각 예술…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와 정신을 진선미(眞善美)에 담아내는 문예(文藝)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아테네의 진정한 가치는 시민주권의 민주주의(Democracy)다. 그리스어 데모스(Demos), 즉 민중이 통치(Cracy)하는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앞서 본 아고라 박물관 접시 속 테미스토클레스는 민중이 다스리던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일까?

▲ 키몬의 이름이 적힌 오스트라콘(왼쪽 사진)이 그리스 아테네 키클라데스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오른쪽은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에 전시 중인 테미스토클레스라고 적힌 오스트라콘. @김문환

◇ BC 480년 페르시아 전쟁 승리 주역 테미스토클레스 

그리스 북부 중심도시 테살로니키에서 터키의 역사고도 이스탄불로 가는 고속도로 중간지점 바닷가에 마로네이아(Maroneia)가 나온다. 바닷길로 이곳을 개척해 소유하고 있던 고대 아테네인들은 BC 483년 마로네이아 지방에서 대박을 터트린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은광(銀鑛)의 발견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여기서 벌어들인 돈을 나눠 가질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나서 색다른 주장을 편다. 이 돈을 나눠 가질 게 아니라 아테네 부자들에게 빌려준 뒤, 이자로 함선을 받자는 제안이다.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해 핵심 전력인 함선을 보강하자는 취지다.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혜안 덕에 최신 3단 갤리선 100척을 손에 넣는다.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이지스함이나 구축함이다. 그의 선견은 빛났다. 3년 뒤인 BC 480년 페르시아가 침공해 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육군에 대항하지 않고, 근처 살라미스 섬으로 시민들을 피신시켰다. 스파르타에서 온 레오니다스 왕 휘하 300명의 결사대가 아테네 북방 테르모필레 벌판에서 전원이 옥쇄(玉碎)하며 페르시아 대군의 진군을 지연시킨 덕분이다. 아테네는 해전에 미숙한 페르시아를 살라미스 해협에서 대파하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거센 바다 폭풍도 아테네를 도왔으니, 수니온 곶에 모셔진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감응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 테미스토클레스를 내쫓은 도편추방제(Ostrakismos)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고대 아고라(Agora)는 2500년 전 모습 그대로 각종 건물터가 오롯하다. 이 아고라에서 아테네 모든 시민이 직접 모여 정책을 결정하던 민회(Eklesia)가 열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의 주역이었지만, 운세가 기운다. 민회에서 세력을 잃더니 급기야 페르시아와 내통한 혐의로 BC 472년 추방되고 만다. 추방 도중 궐석재판에서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적군과 아군의 경계는 백지 한 장 차이인가? 테미스토클레스는 지난날의 적국 페르시아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이때 추방 방법이 도자기 접시나 그 파편을 뜻하는 오스트라콘(Ostrakon, 혹은 Ostraka)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을 적어 내는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 즉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 혹은 Ostracism)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주민소환제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탄핵 제도다. 흥미로운 점은 오스트라콘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 말고 한 명의 이름이 더 보인다는 것이다. 네오클레스(ΝΕΟΚΛΕΣ).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버지다. 동명이인을 분별하기 위해 아버지 이름까지 적는 목적도 있지만, 혈연 중심의 가부장 문화가 발달했던 그리스에서 아버지 이름을 적어 집안에 대한 징벌임을 분명히 해준다.  

◇ 정치 명망가나 조국을 구한 영웅도 한순간에 국민 이름으로 탄핵 

도편추방제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오스트라콘을 찾아 장소를 아테네 시내 중심가 키클라데스 박물관으로 옮겨 보자. 아테네 고대 생활 전시관에 진열된 오스트라콘에 적힌 이름은 키몬(ΚΙΜΟΝ). 테미스토클레스보다 10년 늦게 BC 462년에 도편 추방된 인물이다. 역시 밑에 아버지 이름 밀티아데스(밀티아도, ΜΙΛΤΙΑΔΟ)가 보인다. 밀티아데스가 누구인가?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 아테네의 승리를 이끈 영웅이다. 불과 1만 명 아테네 시민군을 이끌고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페르시아 대군을 마라톤 만에서 팔랑크스(Phalanx,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법으로 물리친 밀티아데스. 아테네 시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밀티아데스 장군의 아들 키몬 역시 BC 480년 페르시아의 재침 때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끌던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명망가 집안이라도, 아무리 공이 커도 독재의 기미만 보이면 가혹하리만큼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 탄핵하는 제도가 도편추방제다. 아테네 시민들은 도편추방제를 왜 만들었을까?  

◇ 민주화 혁명 뒤, 참주(독재자) 출현 방지 위해 만든 도편추방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 보자. 그리스 문명을 상징하는 파르테논 신전이 장엄한 자태를 뽐낸다. 이 아크로폴리스에서 BC 511년 정치 사변이 일어난다. 아테네 민주주의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가 스파르타 지원병의 힘을 얻어 아테네 정치를 왕처럼 장악했던 참주(僭主, Tyrannos) 히피아스의 추방에 나섰다. 지지자를 이끌고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 버티던 히피아스는 재산을 갖고 해외로 갈 수 있다는 조건으로 농성을 풀고 아테네를 떠났다. BC 560년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 민주정치를 뒤엎고 참주가 된 뒤, BC 527년 권력을 이어받은 2대 참주 히피아스 가문의 몰락이다. 하지만, 민주화의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사고라스를 비롯한 구체제 귀족세력이 민주주의를 뒤집으려 한 것이다. 이들도 스파르타 군대를 이용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켜낸다는 시민들의 결사항전에 스파르타 군대가 물러가면서 BC 508년 아테네 시민사회는 민주화를 이룩한다. 이후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는 독재자 출현을 영원히 막아야 한다는 취지로 도편추방제를 고안해 낸다. BC 504∼BC 501년 사이다. 민회에서 6000명 이상 찬성으로 독재자를 국외 추방하는 게 골자다. BC 487년부터 매년 민회에서 도편추방 실시 여부를 묻는 투표를 진행했고, 과반수가 찬성할 때 2개월 뒤 본 투표에 들어갔다.

◇ 도편 추방 결정나면 10일 내 출국, 10년간 입국금지 

본 투표 방법은 추방 대상자의 이름을 도자기에 적는 것. 도자기 파편보다 깨지지 않은 원형 접시가 더 많다. 이 원형 접시에 이름을 적는 시민투표로 추방이 결정되면 당사자는 10일 이내에 아테네를 떠나야 했으며 10년간 민회의 번복 없이는 귀국할 수 없었다. 그 기간 재산권은 인정됐다. 대개 유력 가문의 정치 지망생 가운데 대중의 인기를 모으며 독재를 다질 기미가 보이는 사람은 예외 없이 도편추방 투표에 올랐다. BC 487년 페이시스트라토스 참주 집안에서 1명, 이듬해 BC 486년에는 이 제도를 만든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가 도편추방됐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페리클레스의 부친 크산티포스도 BC 484년 인기 있는 정치 지도자에서 하루아침에 도편추방 당했다. BC 5세기 13명의 지도자가 그렇게 아테네 권력에서 밀려났다.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인을 지도자로 뽑기도 하지만, 언제든 탄핵했던 2500여 년 전 추상(秋霜)같은 민주주의 정신이 귀감으로 다가온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편집 :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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