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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지역 취재 노하우를 말하다
[저널리즘특강] 김영미 독립 PD
주제 ② 전쟁 저널리즘
2018년 08월 11일 (토) 14:04:48 이명주 조승진 권성진 기자 chopromotion@gmail.com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와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 그리고 김영미 PD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전쟁의 참혹함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을 저널리스트로서 겪었다는 점, 그런데도 행동주의자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아닐까? 김영미 독립 PD가 한국 언론에서 독보적인 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을 없을 터이다.

“미군 종군기자 프로그램 참여 때 가장 걱정되는 건 ‘미군에 우호적이지 않은 내용이 나갔을 때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거였죠. 다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고요. 이런 물음을 계속 지니고 있었습니다.”

2008년 여름, 미군 종군 프로그램에 참여해 이라크전 취재에 나섰던 김영미 PD가 당시 느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2012년 출판한 <사람이, 아프다>에서도 “미군에게 유리한 취재를 하지 않으면 쫓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며 종군 저널리즘 시스템이 가진 딜레마를 토로했다.

   
▲ 미군 종군기자 프로그램은 미군과 숙식을 함께 하기 때문에 미국 시각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 flickr

종군 취재는 말 그대로 전쟁 때 군대를 따라다니며 숙식을 함께하는 것이어서 그 군대가 속한 국가의 눈으로 전쟁을 보게 되는 문제점이 지적되곤 한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역시 2009년 <한겨레> 시민편집인 칼럼에서 종군 취재를 뜻하는 ‘임베디드 저널리즘(embedded journalism)’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칼럼에서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크리스 헤지스가 “임베디드 프로그램은 기자들에게 전쟁은 고귀한 작전이라는 신화를 주입한다”고 말한 것을 인용했다.

김영미 PD는 바그다드의 안전지대인 ‘그린 존’(Green Zone)에서 만난 미군 사령관에게 “미국에 이롭지 않은 내용을 촬영하고 내보낸다면 내 촬영을 방해할 거냐”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사령관의 반응은 오히려 ‘쿨’했다. 그는 종군 취재 진행과정에서 저널리스트를 우리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며 결과물에 관해서는 통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김영미 PD는 당시 임베디드 프로그램을 경험하며 자신이 생각한 저널리즘의 경계를 뚜렷하게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종군 취재) 참여는 제 취재 인생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무엇이 표현의 자유고 어느 정도까지 저널리즘이 개입할 수 있는지 스스로 정리하는 시간이었죠. 전쟁을 취재하며 어떤 한 군인 편에서만 촬영할 수는 없었습니다. 형평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미군 종군 취재와 병행해 이라크 저항세력도 반드시 취재해야 했어요.”

운과 촉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숙명

김 PD는 미군과 싸우는 이라크 저항세력을 취재할 당시를 떠올리며 “매 순간 (생사를 건) 판단의 기로에 섰다”고 말했다. 이라크 저항세력이 ‘파티(party)’라고 부르는 미군 기지 공격 작전에 초대받은 적이 있지만 죽음의 위협을 느껴 거절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방법이 반드시 저널리스트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쟁터를 취재하며 죽음의 위험과 촬영해야 하는 순간을 놓고 생사의 경계에서 머리를 써야 했던 괴로움을 묘사하면서도 대부분은 “운과 촉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덧붙였다.

“갈 때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올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돌아오는 비행기가 한국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 안전하게 내렸다는 안도감에 행복했죠. ‘살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 2005년 쿠르드 민병대를 취재하고 있는 김영미 PD. ⓒ 김영미

현장이 너무 살벌할 때는 험비(humvee: 미군용트럭)에서 옴짝달싹 못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같이 이동하던 군인들에게 "크리스티안 아만푸어 같은 기자들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스탠딩 리포트를 해내는 거냐"고 감탄하자, 듣고 있던 미군이 답했다. "아만푸어는 이런 (극단적인) 데 안 오죠."

그에게 현장 취재는 지금까지도 항상 새로운 경험이다. 특히 미군 종군기자로 처음 지원할 때는 부대 리스트를 받아 들고도 무엇이 어떤 부대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원하는 부대를 지망 순서대로 적어내는 과정에서 풍부한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각 부대의 특징을 이미 꿰차고 있는 외신기자들과 달리 백지 상태이던 그는 본의 아니게 남들이 기피하는 위험천만한 침투 전문 공수부대로 배정받기도 했다는 뒷이야기다.

“부대 특징 같은 것들은 군사기밀이라 사전조사를 할 수가 없죠. 그 이후론 부대 이름부터 외웠어요. 덕분에 지금은 부대 이름만 들어도 조언할 수 있을 정도가 됐죠.”

아프가니스탄이 김 PD에게 가르쳐준 두 가지

분쟁지역 ‘전문’ 기자라는 타이틀이 결코 과대포장이 아닌 김영미 PD에게도 당연히 초보 시절이 있었다.

“처음으로 전쟁 지역이 이렇구나 하고 느꼈어요.”

1999년 동티모르에서 1년간 머물며 찍은 입봉작 <동티모르 푸른 전사>(2000년, SBS 방송)를 통해 이미 분쟁지역전문 독립 PD로 ‘머리를 올린’ 김영미 PD가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추억’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2001년 9.11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알카에다 조직이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은 그해 10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결과는 1996년부터 정권을 쥐고 있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탈레반 정부의 참패였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이 함락되자 김영미 PD도 그곳에 발을 디디게 됐다. 목적은 오직 하나. 힌두쿠시의 깊고 험준한 산세만큼이나 꼭꼭 숨겨진 채 침묵하고 드러나지 않던 아프간 여성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서였다.

현실은 쉽지 않았다. 급격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고 한들 즉각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질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아프간 여성들은 여전히 부르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있었다. 당연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누가 누군지, 심지어 여성인지 남성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탈레반은 물러났지만 집안의 남자들인 아버지, 남편, 오빠 등이 '여자는 우리 집 구성원이기 이전에 소유물이기 때문에 얼굴을 보이면 안 된다'며 부르카를 벗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다큐인데 취재원 얼굴이 모두 안 나온다?' 가서 두 주 동안 아무것도 못 찍고 좌절했죠.”

삼고초려 끝에 가까스로 동의를 얻어 촬영한 대상이 공교롭게도 '탈레반이 물러났다'는 안내방송을 한 아프가니스탄 국영방송 아나운서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가 가장인 집이었기에 그녀를 촬영하려면 오빠를 설득해야 했다. 끈질기게 설득 작업을 했더니 그와 친해졌고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아 촬영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 된 다큐멘터리가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2002)이다.

   
▲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거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부르카 색상은 짙은 하늘색이다. ⓒ 이명주

국적, 매체 이름 다 떼고 실력으로 진검 승부

지난한 촬영 과정이었으나 이 취재가 김 PD에게 '복덩이'였다. 그는 “인터넷은커녕 전화조차 잘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외신기자 시스템도 생소했다”며 당시 취재의 총체적 어려움을 떠올렸다. 세계 각지에서 온 외신기자들은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자기만 왕따가 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콧대 높아 보이던 외신기자들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한 반전이 찾아왔다.

‘여자 얼굴을 찍었다고?’ 당시 그곳에 있던 외신기자는 대부분 남자였기에 여성 취재원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찍은 걸 보여 달라'며 초미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넌 뭘 줄 건데'라고 물었어요. 이때부터 외신기자들과 정보를 주고받는 '딜'을 할 수 있게 됐죠. 내가 가진 게 많을수록 다른 이들의 정보를 더 많이 가져올 수 있고, 그러다 보니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정보가 계속 늘어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기더라고요. ‘나는 이걸 아니까 너는 이걸 알아다 줘’라고 하면 정보를 열심히 물어다 줘요."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이 ‘거래’에서 매체 이름만으로는 ‘끗발’이 발휘되지 않다는 사실이다.

“굉장히 신기한 건 매체 이름, 이런 게 상관없다는 거예요. 무려 외신기자 친구들은 10년 가까이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충격이었죠. 내 국적 등에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실력과 정보력으로만 ‘계급’이 나눠진 거죠. ‘실력이 필요하구나’ 느낀 곳이 아프가니스탄이었어요."

저널리스트에게 필요한 건 ‘자기와의 대화’

저널리스트로서 ‘진짜 실력’을 강조하던 김영미 PD가 언론인 지망생들 앞에서 PD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로 꼽은 건 ‘자신을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을 수 없고, 그러면 하나 마나 한 취재를 하는 거라고 강조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 애정을 가지고 취재를 할 수 있겠어요? 사람에 애정이 없는 기사는 ‘기레기’ 소리 듣기 딱 좋은 리포트예요. 시리아 난민 취재 중이었어요. 난민 가족이 에게해를 건너는 고무보트에 올라탔고 나는 그리스 쪽 도착지에서 그들과 다시 만날 예정이었는데, 결국 그 집 아이의 공룡 피겨, 장난감이 들어간 ‘스폰지밥’ 캐릭터 배낭만 발견됐죠.”

유럽으로 피란길에 오른 한 시리아 난민 가족을 동행 취재하며 겪은 슬픔을 이야기하던 김영미 PD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 김영미 PD는 분쟁지역 취재현장에서 느낀 많은 어려움들을 토로했다. ⓒ 조승진

삶과 죽음이 질서 없이 엇갈리는 취재 현장에서 겪는 극도의 긴장감과 취재를 마친 뒤 찾아오는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과 싸워내야 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다. 그는 자신과 대화하면서 힐링을 경험하고 자존감을 회복한다고 했다.

스트레스 해소법을 묻는 말에 쑥스러운 듯 웃으며 웹툰 보고 게임하며 스트레스 푼다고 답했다. 사춘기 아들과 소통하려고 시작한 취미지만 어느덧 훌쩍 자란 아들은 ‘탈덕’했는데 자신은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급한 편집을 하다가도 “작가님, 수요일이라 웹툰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그는 건강론도 남달랐다.

"내 몸도 취재 장비이기에 내 취재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든 간에 양질의 정확한 보도와 취재를 보기 원하는 대중의 요구와 '알 권리'가 있잖아요. 그러기 위해선 몸도 마음도 정상적이고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도록 노력해야죠."

그는 강연 마지막 무렵 PD로서 그만의 자부심을 밝히기도 했다,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저널리스트로 살아온 자부심뿐이라며. 그는 “아파트나 차 이런 건 못 줘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엄마로 아이에게 남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저는 예순 살이 되면 은퇴할 거예요. 저는 이제 2/3를 왔고 1/3이 남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훌륭한 언론인이 되십시오. 좋은 저널리스트가 되는 길은 힘들어요. 그래도 스스로 행복한 저널리스트가 되길 바래요. 저한테 이 일은 현지인들의 하트를 우리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전할 수 있어서 행복한 직업이에요. 그 행복한 방송을 받을 권리가 국민들에게 있죠. 행복하지 않은 PD가 만든 방송이 행복할까요?”

‘행복한 PD가 만든 행복한 방송.’ 독립PD인 그가 1인 시위도 지나치지 않고 광장에서 연대하고 투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 1학기 [저널리즘특강]은 한승동 김영미 오연호 강정수 이정환 최경영 박인규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조승진 기자]
단비뉴스 조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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