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삶’

▲ 김이현

오늘 옆집 여자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머리가 떡 진 사내 둘이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린 뒤에야 알았다. 사망한 여성의 신원을 확인할 데가 없어 일단 옆집으로 찾아온 모양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사 온 첫날,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시루떡을 나눴지만 그녀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갓난 아이 둘은 세상에 울음만 내뱉다 돌아갔단다. 수첩에 무언가 적더니 협조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고개를 숙인다. 협조의 의미를 되새기다 문을 닫는다.

7층. 조금 좁긴 해도 괜찮았다. 층수에 의미 부여를 해가며 새로운 삶을 살면 그만이었다. 몇 해 전, 딱 10층 더 높은 곳에서 허망하게 뛰어내린 노인이 있었지만 잠깐 꺼림칙할 뿐 금세 잊혀졌다. 옆집 여자에 대한 안타까움도 오래가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안에 들어서면,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그릇 깨지는 소리, 악을 내뿜는 싸움은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온 뒤에도 계속됐다. “여보, 우리 이사 갈까?” 덤덤하게 묻는 내 말에 더 태연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어떻게?”

직장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은 은행 대출창구에 가기도 전에 사라졌다. 작지만 볕 잘 들고, 깔끔한 부엌 있고, 아기 미끄럼틀 넣을 만한 집을 바라는 일이 우리 통장 잔고 안에서 불가능하다는 건 명백했다. 돈이 없다는 것, 가난하다는 것은 양말 한 짝에도 취향을 들이밀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했다. 욕망이 좌절된 날 밤에는 꿈이 날 괴롭히기 일쑤였다. 끝없는 미로에서 혼자 길을 찾아 헤매는 나는 형체도 윤곽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아무도 나를 봐주려 하지 않았고,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미로를 벗어나려 발버둥칠수록 탈출구와 더 멀어질 뿐이었다.

▲ 위험은 가난한 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탈주하자'고 다짐해도 탈출구는 없다. ⓒ pixabay

‘탈주하자.’ 새벽녘 출근길에 맹세하는 다짐은 피로가 어깨 위를 짓누르는 밤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곳을 빠져 나와 살고 싶은 욕구도 금방 사라졌다. 현실과 타협하는 일은 익숙한 방법이었다. 병약한 육체가 잔디밭에 고꾸라져 생사를 달리해도, 뜨거운 울음이 재처럼 식어버려도 그것은 내 일이 아니었다. 아파트 값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해 부동산을 들락거리는 슈퍼 아주머니의 태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겉으로 더 단단해진 듯했지만 속으로 무뎌졌다. 괘씸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려 할수록 괜찮은 방법들은 나를 그곳에 머물게 했다.

오랜만에 튼 TV 화면에는 앵커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상관없는 부동산정책을 알기 쉽게 요약한 그래픽 화면도 나왔다. 뉴스 말미에 한 가장이 투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가 처량하게 매달려 있다 발견된 곳도 그리 멀지 않은 도심이었다.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즉 삶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은 널려있다. 이 위험은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적절히 회피하고 안전망을 확보할 만한 수단과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가난하다는 것은 위험한 삶에 대한 면역력 결핍을 뜻한다. 나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윤택한 삶이란 궤도에 오르기 위해 면역력을 키우려 하지만, 번번이 악성 종양들이 찾아와 좌절시킨다. 삶이란 원래 그런 걸까? 설사 모든 것이 치유된다 해도, 내 뜻대로 살지 못하는 걸까?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으로만 남게 된다. 우리 모두가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깨닫자, 꿈도 이제 꿈이 아니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11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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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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