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찬 칼럼] 귀납적으로 수호하는 기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에는 현직 언론인을 위한 저널리즘혁신학과가 있다. 온라인으로 공부하는 석사 학위과정이다. 이번 학기 나는 ‘저널리즘 역사와 사상’을 강의한다. 사회사상과 과학철학을 엮어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저널리즘의 뿌리를 파보겠다며 눈을 반짝이는 기자·피디들이 평일 저녁 화상 강의에 출석한다.
얼마 전, 존 밀턴과 제임스 매디슨을 발제하고 토론했다. 수업 마지막에 이르러 중견 기자인 수강생이 내 입장을 물었다. “어느 쪽인가요? 밀턴인가요, 매디슨인가요?” 다른 기자들은 “날카로운 질문”이라며 깔깔 웃었다. 강의가 끝난 캠퍼스에서 하늘을 올려 보는데, 별들이 반짝이며 또 물었다. 이제 어쩔 것인가. 밀턴인가, 매디슨인가.
1644년 존 밀턴은 팸플릿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에 “모든 자유 가운데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알고 주장하고 토론할 자유를 달라”고 적었다. 권력의 검열에 반대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모든 자유에 선행하는 근본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선언이자 씨앗이었다. 1791년 제임스 매디슨은 그 씨앗의 싹을 틔웠다. 미국 건국 헌법을 주도했던 그는 10개 조항의 권리장전을 작성하여 헌법에 추가했다. ‘의회는 종교, 표현, 출판, 집회, 탄원의 권리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어선 안 된다’는 명령이 그 첫 조항이다. 표현의 자유를 제일원리로 삼는 공화국이 처음 탄생했다.
표현의 자유에 뿌리를 두고, 또한 그 자유를 꽃피우려고 저널리즘이 형성됐으니 밀턴과 매디슨은 기자들의 먼먼 조상이다. 다만 그 이상을 실천한 방식이 서로 달라, 후손들은 헷갈린다.
유럽 국가들과 긴장했던 건국 초기, 미국 연방정부는 국익에 반하는 언행을 ‘이적 선동’으로 처벌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매디슨은 격렬히 반대했다. 전쟁 시기라 할지라도 국가 이익을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옛 압제자였던 대영제국과 타협하자는 주장까지 포함하여 여러 정파가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의 남용은 불가피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밀턴의 방법은 달랐다. 가톨릭과 결탁한 왕정에 맞서 시민혁명에 가담했던 그는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통제가 불가피하다고 봤다. 그가 주창한 표현의 자유는 루터파, 칼뱅파, 국교파 등 프로테스탄트 내부 분파에 한정됐다. 그들 간의 자유 토론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자유를 억압하려는 세력의 의견을 대중에게 전파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크롬웰 공화정에서 그는 법원의 검열관으로 일하며 왕당파를 처벌했다.
‘모든 의견에 대한 관용’을 매디슨이 주장한 배경에는 반대파를 일일이 논파하겠다는 열정과 실력이 있었다. 무한정 떠들도록 내버려 두는 게 관용의 목적은 아니었다. 자유로운 여론 시장에서 반자유 세력을 공개적으로 무력화하는 게 공화국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 길을 복잡하게 여기는 이에겐 ‘반자유에 대한 불관용’을 실행한 밀턴이 매력적일 것이다. 이 방법의 위험은 부메랑 효과에 있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판단(또는 선전)하는 누구나, 심지어 파시스트조차 밀턴의 방법을 차용한다. 검열의 칼을 뽑고 싶다면, 그 칼의 뒤가 아니라 앞에 섰을 때 어떨지 생각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 심판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는 밀턴과 매디슨의 일을 겪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최우선인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관용하고, 어디부터 불관용할지 자문하고 있다. 이제 대선 국면이 시작됐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건 정치 일정이고 저널리즘의 일정은 다르다. 기자들에게 올봄은 그저 대선 보도의 시기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에 기댄 말과 행동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아내야 할 시절이다. 린치로 이어지는 집회와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을 어떻게 취재 보도할지 고심해야 할 시절이다.
그 답은 밀턴과 매디슨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에 있지 않다. 사회를 유기체에 비유하자면, 저널리즘은 두뇌가 아니다. 심장도 아니다. 감각 기관이다. 그것이 기자의 일을 비루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밀턴의 심장과 매디슨의 두뇌가 작동하려면, 오감을 동원해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모든 걸 감각해야 한다는 게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한 저널리즘의 결론이다. 법정과 의회와 광장의 언행을 낱낱이 기록할 시간이 왔다. 그 시공간을 달릴 기자의 무기는 ‘귀납’이다. 표현의 자유는 오직 귀납적으로만 수호된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 3월 28일 ‘사실과 의견’ 코너에 실렸던 것을 신문사의 허락을 얻어 일부 수정해 전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