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사랑의 탐구’
※영화 ‘사랑의 탐구’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소년이 소녀에게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 소녀가 소년에게 묻는다. “왜 나를 사랑하니?” 소년은 자라서 예술가가 된다. 예술가가 된 소년은 영화, 소설 그리고 시로써 소녀의 질문에 답한다. 수많은 소년이 소녀에게, 소년이 소년에게, 소녀가 소년에게, 소녀가 소녀에게 그렇게 응답했다.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 수없이 많은 것은 자연스럽다. 세상에 사랑이 수없이 많으니까.
끝끝내 답을 얻지 못할 질문에 대하여, 영화 ‘사랑의 탐구’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제이크 질렌할이 히스 레저를 향해 말한다. “너를 끊는 법을 알고 싶어.” 사람들은 이따금 사랑을 향해 말한다. “너를 끊는 법을 알고 싶어.” 지난 연애의 폐허 위에서 사람들은 다짐한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그러고는 곧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은 변덕스럽고 불가해한 동물이라서, 우리는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탐구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사랑에 대한 드라마와 영화가 이미 넘쳐나고, 오늘도 너무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까닭은 사랑에 대한 질문에 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원히 미결로 남을 난제에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각주를 붙인다. 사랑에 다는 영화적 각주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 ‘사랑의 탐구’이다.
사랑의 탐구는 캐나다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지난해 열린 제76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8일에 개봉했다. 사랑의 탐구는 캐나다 영화지만 더 정확히는 퀘벡 영화로서 프랑스어 영화다.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고, ‘프랑스의 오스카’라고 불리는 세자르상에서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연출한 모니카 쇼크리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데, 그는 캐나다 퀘벡 출신 배우이자 감독이다. 2005년부터 배우로 활동하다가 2013년에는 첫 단편영화를, 2019년에는 첫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감독이 되기 전에 먼저 배우로 데뷔했다는 점, 칸의 총애를 받는 퀘벡 출신 감독이라는 점과 연기와 연출 모두 훌륭하게 해낸다는 점에서 그는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와 ‘로렌스 애니웨이’로 유명한 자비에 돌란 감독을 연상케 한다. 흥미로운 점은 쇼크리 감독이 돌란 감독이 연출한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쇼크리 감독은 돌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하트비트’에서 주연을 맡았다. 청춘의 짝사랑을 다룬 이 영화에서 쇼크리 감독은 (돌란 감독이 연기한) 게이인 ‘프랑시스’의 친구 ‘마리’ 역을 연기했다. 쇼크리 감독은 ‘로렌스 애니웨이’에도 출연했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 ‘탐엣더팜’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연출과 주연을 맡은 돌란 감독처럼, 쇼크리 감독도 자신의 전작 ‘베이비시터’에서 육아에 지친 나딘 역을 맡기도 했다.
의도적인 작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랑의 탐구에는 돌란 감독과 이름이 같은 ‘자비에’(프란시스 윌리엄-레옴)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마흔 살 철학 강사인 ‘소피아’(마갈리 레핀 블롱도)이다. 소피아는 자비에와 십 년째 안정적인 파트너 관계를 유지해 왔다. 언제나 처음 보는 이성이 문제를 일으키는 법. 소피아는 별장을 수리하러 온 인테리어 시공업자인 ‘실뱅’(피에르 이브 카디날)과 함께 맥주를 마신다. 얼굴에 불콰한 주기가 맴도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 시선을 교환하고, 결국 그날 밤 그들은 소피아의 별장에서 섹스를 한다. 이후 실뱅의 존재는 자비에와 소피아의 관계에는 균열을, 소피아의 인생에는 혼란을 일으킨다.
뻔한 로맨틱 코미디의 서사이다. 상반된 매력을 지닌 두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삼각관계. ‘응답하라 1994’나 ‘응답하라 1988’, 혹은 ‘상속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통속적인 로맨틱 코미디와 사랑의 탐구가 구별되는 지점은 이 영화가 지닌 ‘사회학적 상상력’에 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것. 따라서 사랑은 사회적 맥락의 공백 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사랑의 발생과 해체는 얼마간 사회적이라는 것. 이러한 사회학적 통찰이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 영화가 탄생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쇼크리 감독은 1928년 출간된 D.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르주아 계급 여성과 노동자 계급 남성의 육체적인 사랑을 다뤘다는 점, 노동자 계급 남성과의 관계가 상류층 남편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끈다는 점,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긍정한다는 점, 작중 등장하는 빈번한 성적 묘사는 육체적 욕망을 체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광범한 서사적 교집합을 지닌다.
계급 없는 계급사회 - ‘사랑의 탐구’가 드러낸 현대적 계급성
“‘부잔데 착해’가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지. 뭔 소린지 알어?” (‘기생충’, 극 중 인물 충숙의 대사)
사랑의 탐구의 주인공 세 사람은 자신이 귀속된 계급의 계급성을 체현하는 인물로 제시된다. 우선, 자비에와 소피아는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특히 자비에의 집안은 매우 부유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우아하고 세련되고 훌륭한 매너를 지녔으며, 착하다. 착한 부르주아는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형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 갑질을 일삼는, 잔혹한 안하무인형 인물이 아니다.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친절하고 다정한 부자들이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도 이러한 유형의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버닝’(2018)의 벤(스티븐 연 역),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기생충’(2019)의 박동익(이선균 역)과 김은숙 작가가 각본을 맡은 ‘더 글로리’(2022-2023)의 하도영(정성일 역)이 대표적이다. 박찬욱 감독도 2003년, 월간 말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혼란스럽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혼란이 점점 더한 건 과거 사악한 집단으로 여겼던 자본가나 기득권층이 직접 만나보면 상당히 젠틀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낄 때다. 화가 나서 미치겠다. 문제는 지금 그들이 창업자나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아니라 2세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꼬인 게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착하다. 그러니까 더 화가 나는 거다. 예전엔 못 가지고 무식한 사람들이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다는 것. 빈부의 격차가 인격이나 인성마저도 그렇게 비틀고 있다.”
노동자 계급에 속한 실뱅은 착하지 않다. 영화는 자비에와 실뱅의 성정을, 이들이 소피아와 첫 번째 이별을 하는 장면으로 드러낸다. 자비에는 자신에게 불륜을 고백하는 소피아 앞에서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반면 실뱅은 소피아의 집에 놓여있는 자비에의 외투를 본 직후 그녀를 향한 강한 소유욕과 집착 그리고 폭력성을 노출한다. 이후 실뱅은 소피아의 생일 파티에서 인종차별적인 언사로 소피아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탁월한 균형감각은 이 영화가 갖춘 미덕이다. 감독은 ‘착한 부자’ 소피아와 자비에가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표출하는 장면도 마련한다. 부르주아인 그들이 공히 지닌 인격적 결함은, ‘버닝’의 벤, ‘기생충’의 박동익과 ‘더 글로리’의 하도영이 지닌 그것과 꼭 같다. 바로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지니는 우월감이다. 특히 소피아의 계급적 또는 지적 우월감은 실뱅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해 두 사람의 이별에 기여하기도 한다. 실뱅은 소피아에게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는 말투를 쓰지 말라고 소리친다. “내 세계에서 내 말투는 평범해.” 소피아의 답이다. 소피아는 그렇게 ‘나’와 ‘너’의 세계를 구분하고, 어법에 어그러지고 고상하지 않은 실뱅의 말투에 불만을 드러내고, 음모론에 심취한 실뱅의 어머니에게 경멸을 표현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주는 소피아와 자비에 커플이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와 소피아가 실뱅의 집을 방문해 실뱅의 가족과 나누는 대화가 시종일관 대조적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소피아와 자비에 커플이 지식인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다. 반면 실뱅이 가족들과 나누는 대화는 경험적이고 일상적이다.
우리는 왜 이별했을까?
사랑의 탐구에서 소피아는 두 남자와 네 번의 이별을 경험한다. 자비에와 헤어지고, 실뱅과 헤어지고, 재결합한 자비에와 다시 헤어지고, 실뱅과도 결국 다시 헤어진다. 사랑의 탐구가 사회학적 텍스트인 이유는 실뱅과 두 번의 이별이 사회적 이별이기 때문이고, 철학적인 텍스트인 이유는 자비에와 두 번의 이별에서 사유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피아가 실뱅과 헤어진 이유는 ‘아비투스’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계급이 제도적으로 철폐된 민주주의 시대에도 계급이 엄존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한 학술적인 분석의 틀로 부르디외가 고안한 것이 아비투스다. 계급적 차원에서 아비투스는, 거칠게 말하면, 계급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 가치관, 사고방식과 취향 등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파리 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상류층이 아비투스를 통해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세습한다고 주장했다. 영화에서 소피아와 실뱅이 철저하게 다른 말투로 말하는 것, 소피아와 소피아의 지인들의 지적인 (또 얼마간 현학적인) 대화에서 실뱅은 철저하게 소외되는 것, 소피아와 실뱅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은 것은 모두 두 사람이 지닌 아비투스가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그려진다. 소피아와 실뱅은 둘 다 프랑스어로 대화하지만, 소피아의 말은 실뱅에게, 그리고 실뱅의 말은 소피아에게 외국어 같은 타자성을 지닌다.
소피아가 자비에와 헤어진 이유는 ‘육체적 사랑’ 때문이다. 자비에가 정신적 사랑의 현현이라면, 실뱅은 육체적 사랑의 현현이다. 소피아와 자비에의 관계가 10년 동안 유지된 것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제공한 정서적 안정감과 지성적 교류 덕분이었다. 다만 소피아는 자비에와의 관계를 통해 성적 쾌감을 얻지 못하고, 결국 소피아는 자신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실뱅에게로 떠난다. 페미니즘 영화인 ‘베이비시터’의 감독답게 영화의 정사 장면은 여성의 육체를 전시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정사 장면이 나오는 동안 카메라는 클로즈업한 소피아의 얼굴을 오래 응시한다. 관객은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소피아의 표정이 얼마나 다른지.
당신의 답은?
“당신(감독)이 관객들에게 정답을 준다면, 당신의 영화는 그저 영화관에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질문들을 던진다면, 당신의 영화는 관객들이 그것을 감상한 이후에 시작할 것이다. 사실, 당신의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 계속 상영될 것이다.”
‘어바웃 엘리’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세일즈맨’ ‘어떤 영웅’으로 유명한 이란 감독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말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와 다른 사람을 다르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것일까. 우리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 사이의 조화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은 성취될 수 있는 것일까.
오늘도 지구 어느 곳에서 소녀는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 소년이 소녀에게 묻는다. “나를 언제부터 사랑했니?” 소녀는 소년에게 바로 응답하는 대신 언젠가 영화 한 편을 만들 것이다. 사랑의 탐구는, 그렇게 영속할 것이다.
단비뉴스 미디어콘텐츠부, 소셜전략팀 이정우입니다.
There is no exquisite beauty without some strangeness in the propor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