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머니 조성을 위한 예술인 축제 '씨앗페' 열려

씨앗페를 찾은 싱어송라이터 단편선과 피아니스트 이보람. 김재용 기자
씨앗페를 찾은 싱어송라이터 단편선과 피아니스트 이보람. 김재용 기자

지난달 21일부터 지난 2일까지, 서울 경복궁역 일대에서 ‘씨앗페’가 열렸다. 씨앗페는 예술인들에게 저금리 대출을 해주기 위한 기금의 초기 자금을 모으기 위한 행사다. 씨앗페는 ‘시드머니’와 ‘페스티벌’에서 따온 말로, 400여 명의 예술인으로 이루어진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이 주관했다. 싱어송라이터 천용성, 단편선을 비롯한 예술인 수십 명이 공연과 전시를 통해 씨앗페에 참여했다.

# 예술인 A는 신용카드 대금 일부를 단기 대출로 돌려 나중에 갚는 카드 서비스를 신청했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 바로 대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히 돈이 필요해 신청한 서비스였지만, 이후 20%에 육박하는 고금리가 적용된 청구서를 받았다.

# 예술인 B는 조연 배우로 활동 중이다. 이번 영화에도 조연으로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제작사 측 사정으로 출연 계약이 ‘엎어졌다’. 당장 나가야 할 돈이 많았다. 은행은 정기적으로 고용되지 않는 예술인들의 신용등급을 낮게 매겼다. 정부지원 대출 수령까진 꼬박 한 달 정도가 걸릴 듯했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에 상담을 요청해온 예술인들의 사례이다. 이렇듯 당장 생계 자금이 급한 예술인들에게 저금리 대출을 해주기 위한 노력 끝에 씨앗페가 시작되었다. “예술을 ‘지원’한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난달 27일 경복궁 앞에서 <단비뉴스>와 만난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 이사장의 말이다. 그는 북서울신협과 약 일 년간의 조율 끝에, 기금을 조성해오면 그 6배 정도를 저금리로 대출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지난달 31일 씨앗페는 이미 1000만 원의 기금 조성 목표를 달성했다. 7일에 걸쳐 많은 뮤지션이 행사장을 다녀갔고, 팬들이 ‘인스타그램’ 등에 공유한 짧은 영상들은 씨앗페의 이름을 달고 공유되었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 이사장. 김재용 기자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 이사장. 김재용 기자

“국민 한 사람당 악기 하나를 다룰 수 있는 나라를 생각해보세요. 화성에 가는 일이 우리의 삶을 당장 바꾸지 않음에도 미래를 바꾸는 것처럼, 예술도 같습니다. 시혜적으로 지원해줄 영역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진흥될 영역이죠.” 서 이사장은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씨앗페 개최 이전 그를 찾아온 예술인들은 정부가 시행하는 지원 정책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으로부터 대출이 거절되자 단기간에 현금을 구할 수 있는 대부업체의 손을 빌린 이들도 있었다. 예술인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예술인생활안정자금’의 까다로운 절차와 자격 요건이라는 장벽을 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가 2018년부터 추진해 온 예술인생활안정자금은 연이율 2.5%의 저금리로 예술인들에게 결혼자금, 의료비, 긴급생활자금 등을 빌려준다. 그러나 대출을 위해서는 예술활동을 증명해야 한다. 시인 K 씨는 “예술활동증명의 기준이 높진 않다. 그러나 심사 기간이 무척 길다. 공식 승인까지 반년 이상이 걸린 사례들도 있다. 애매한 기준을 맞추지 못해 한 번 탈락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증명이 늦어짐에 따라 긴급생활자금 수령 또한 늦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도 예술활동증명 신청부터 완료까지 보통 3개월에서 6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털어놨다. 올해 1월 1일부터 지난달 26일까지 약 4개월간 예술인활동증명 신청은 총 1만 8760건인 데 비해 예술활동증명을 맡은 담당 정직원은 5명뿐이다. 신청은 몰리는데 담당 인력은 부족해 ‘긴급’ 생활자금이라는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처리가 더딘 것이다.

씨앗페 행사가 열린 ‘오디오가이’ 입구에 붙어 있는 대자보. 씨앗페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김재용 기자
씨앗페 행사가 열린 ‘오디오가이’ 입구에 붙어 있는 대자보. 씨앗페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김재용 기자

문화체육부 통계를 보면 예술인의 75.2%는 자유계약자, 즉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며 일용직·기간제 등 단기 일자리에서 활동하는 비율이 높다. 또한 예술인 중 서면 계약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48.7%에 불과하다. 일자리를 잃고 갑자기 생계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 극작가 M 씨는 “국가지원금을 받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며 극단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한 적이 있다. 서면 계약서가 없는 상태에서 공연 2주를 앞두고 갑작스레 받은 통보였다. 예정되었던 수입도 갑자기 끊겼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고용 관계에 놓인 예술인들에게 승인까지 최대 6개월이 걸리는 대출은 안전망이 되어주기에 부족했다. 매월 신청 기간과 지급일이 정해져 있어, 예술활동증명을 받더라도 추가로 한 달 이상을 기다리게 될 수 있다.

서류상 증명 가능한 예술활동이 적을 수밖에 없는 ‘신진예술인’도 예술인생활안정자금의 대출 대상에서 제외된다. 서 이사장은 “작품을 이제 막 준비하려는 예술인들까지도 정부가 이자상환확률을 두고 평가하기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면 예술 활동을 향한 길이 막힌다”며 정책의 허점을 지적했다. 긴급생활자금의 경우 직전 도의 소득이 2000만 원을 초과하는 예술인은 아예 대출 대상에서 제외된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예산이 부족해 긴급생활자금에 대한 수요에 맞추기가 어렵다. 그래서 중위소득 75% 선에서 일괄적으로 기준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들을 위해 저금리 대출 기금을 만들겠다는 것이 씨앗페의 취지다. 기금을 통해 마련될 ‘예술인상호부조대출’은 신청 후 3~7일 내에 5%의 금리로 대출금을 지급한다. 서 이사장은 “2021년에 이미 불안정 고용노동자를 대상으로 1억 원 규모의 긴급대출을 대행한 적이 있다. 현재 18만 원 정도를 제외한 대출금을 모두 상환받았다.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함께 마련한 기금이기에 가능했던 상환율”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인들이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모은 기금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예술인지원시스템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씨앗페가 열린 ‘인디프레스 갤러리’. 김재용 기자
씨앗페가 열린 ‘인디프레스 갤러리’. 김재용 기자

씨앗페 공연은 한 뮤지션당 30분간의 짧은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공연을 위해 30분 동안 리허설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씨앗페에 참여한 싱어송라이터 K 씨는 “좋은 공연을 보여드려야지 밤에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며 연주자들과 함께하는 공연을 마친 뒤 기타를 들고 홀로 무대에 섰다. 공연 후 인터뷰에 응한 그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제가 사랑하는 음악인들을 돕고 싶어 참여했다. 생활인으로서 삶을 유지하고 존엄하게 살기 위해서는 예술로 버는 돈만으로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있다. 모금 행사가 없더라도 예술가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서 이사장은 “씨앗페는 결국 정부에게 같이 하자는 신호를 보내는 일이다. 적절한 제도를 마련해준다면 모금이 없어도 예술인들이 예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문체부는 ‘예술인 복지정책 기본계획 2023~2027’에서 대출에 필요한 증명과 절차 간소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각 지역에 있는 문화재단 등 관련 기관들과 협의해 업무 분산을 모색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세부 장르별 특성을 고려한 정책도 검토하고 있다.

서 이사장은 이에 대해 당사자인 예술인과 긴밀한 소통을 통해 정책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아주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는 중이라고 믿는다. 긴 호흡으로 작은 파도가 치듯이, 각자가 자기 몫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사회는 분명 더 좋아질 것이다. 씨앗페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라고 말했다. 지난 2일 씨앗페가 끝난 뒤에도, 씨앗페에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온라인으로 전시되고 있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은 앞으로도 대출을 비롯한 예술인 지원 사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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