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로그인 회원가입
2018.12.12 수
> 뉴스 > 칼럼 > 상상사전
     
삼성에게 ‘또 하나의 가족’은 누구인가
[상상사전] ‘가족’
2018년 02월 20일 (화) 19:03:09 나혜인 기자 nahyein8@gmail.com
   
▲ 나혜인 기자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 한때 내세웠던 구호다. 1997년 봄 첫선을 보인 이 전략적 광고는 집행 4개월 만에 기업 이미지 호감도 1위라는 성과를 냈다. 그해에만 ‘대한민국 광고대상’ 금상을 비롯해 신문사가 주는 광고상 9개 중 7개를 휩쓸었다. 시의성도 좋았다. 어스름한 저녁, 지친 일상을 마치고 포장마차에 들른 가장이 삼성 휴대전화로 걸려 온 딸의 반가운 목소리에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외환위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어우러져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했다.

   
▲ 1990년대 말부터 10여년간 삼성이 광고에서 내세웠던 구호는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 삼성전자

하지만 우리는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또 하나의 가족’에서 주목해야 했던 건 ‘가족’이 아니라 ‘또 하나’였다. 삼성에게 그들을 먹고 살게 해준 노동자와 국민은 ‘진짜 가족’이 아니었다. 총수 일가의 세습경영을 위해 국민 노후자금을 건드리고, 수십조대 영업이익을 남기면서도 회사 돈 벌어주려다 백혈병에 걸린 직원들에게 산업재해 보상은 아까워하는 게 삼성이다. 권력에 줄을 대는 데는 누구보다도 ‘유능’해 승마선수에게 수십억짜리 말을 갖다 바쳤다. 최근에는 다스의 자금 반환소송 비용을 대납하는 등 대형 정경유착 사건이 터졌다 하면 삼성이 거론될 정도로 ‘그들만의 가족’을 편애해왔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게 무슨 가족 같은 낭만적 기대냐고? 그렇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집단이 기업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삼성에게 해준 헌신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 삼성은 스스로 우뚝 선 게 아니다. 그 뒤에는 삼성을 때로는 진짜 ‘가족’보다 중시한 수많은 노동자와 국민이 있었다. 삼성은 국민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국민은 ‘삼성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프레임 안에 갇혔다.

언론은 ‘최대 광고주’ 삼성을 모시려 앞다투어 선봉에 섰다. 이재용은 최순실 사태로 구속된 뒤 격노해 언론사 광고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특히 관련 보도에 적극적이었던 매체에는 아예 광고를 주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오너가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언론을 기업의 수족으로 생각하고, 언론은 그 앞에 알아서 기는 신세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글로벌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순위’에서 89위에 그쳤다는 외신에 우리 언론은 ‘더 이상 삼성의 이미지 실추를 막아야 한다’고 외쳤다.

   
▲ 이재용 석방 소식을 보도한 지난 6일자 조선일보 1면. 보수경제지들은 재판 기간 내내 앞다투어 이재용을 옹호했다. ⓒ 조선일보

산재 인정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흔히 보수경제지의 ‘재벌 옹호론’에 단골로 등장한다. 80년대 이병철 회장의 결단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반도체 왕국 삼성’의 신화도 없었다는 식이다. 기업혁신을 이끄는 요소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강조되는 시대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오너 경영’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반론권이 탄탄히 보장된다. 삼성반도체를 오너 경영 성공사례로 부각하면서도 실패한 삼성자동차는 외면하고,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의 유수 기업들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고려해 위험한 반도체 사업에 적극 뛰어들지 않았다는 정보는 함께 주지 않는다.

가족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집단 개념인 가족에 개인이 희생되는 사례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혈연관계인 가족도 그런데, 사회까지 가족주의를 확대 적용하려는 철 지난 생각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사실 삼성은 언제나 같았다. 언론이, 시민이 이제 삼성과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재용이 아니라, 세계적인 경기 불황에도 삼성의 배를 불려준 노동자와 소비자를 주목해야 한다. ‘또 하나의 가족’보다 우리 스스로를 먼저 챙길 때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민주 기자

[나혜인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나혜인입니다.
적당히 벌고 아주 잘살자!
     관련기사
· 물리적이지만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
· 임대주택 거주가 성공인 시대 와야
· ‘새됐다’는 말의 주제넘음
· 백성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나혜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단비뉴스(http://www.danbi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나누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Follow danbi_news on Twitter

단비뉴스소개기사제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7136)충청북도 제천시 세명로 65(신월동 579)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413호|Tel 043)649-1557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충북 아 00192|발행인: 이봉수|편집인: 김문환|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문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환
Copyright 2009 단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nbi@danb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