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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보다 강렬한 ‘두 여경’ 분투기
[단비월드] 2016 퓰리처 수상작 ‘믿을 수 없는 성폭행 이야기’
2017년 07월 02일 (일) 23:49:13 신혜연 기자 s01928@naver.com

성폭행범 잡는 여성 ‘투캅스’의 활약. 2016년 해설보도부문 퓰리처상을 받은 온라인 기사 ‘믿을 수 없는 성폭행 이야기’에 한국식 부제를 단다면 이쯤 될 것이다. 기사는 연쇄 성폭행범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여성 경찰관의 활약을 다뤘다. 주인공은 미국 콜로라도주의 스테이시 갤브레이스 형사와 에드나 헨더숏 형사다. 끔찍한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미궁에 빠질뻔한 사건이 점차 실마리를 드러내는 과정은 추리소설처럼 긴장감을 자아낸다. 마침내 범인을 체포하는 대목에 이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기사를 쓴 두 기자 중 하나인 켄 암스트롱은 비영리 탐사매체 <마셜 프로젝트>에서 내러티브(서사적 문체) 전문기자로 활약 중이다. 어쩐지. 사건 전개부터 심리묘사까지 빨려 들어갈 듯 매력적인 기사다. 

일반문서(A4)용지 31쪽 분량에 달하는 기사를 읽고 나면 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이다. 소설과의 차이라면 두 기자가 말한 것처럼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쓴 글’이라는 점이다. “18세 소녀는 자신이 칼끝으로 위협당했다고 해놓고는 얼마 안 있어 지어낸 이야기였다며 말을 바꿨다. 우리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 여기다.” 이 소녀는 성폭행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가,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이유로 졸지에 위증죄 피고인 신분이 된다. 기자는 소녀의 뒤엉킨 인생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 2016년 퓰리처상 해설기사부문 수상작 ‘믿을 수 없는 성폭행 이야기’는 연쇄 성폭행범을 추적해나가는 갤브레이스(왼쪽)와 헨더숏 형사의 활약상을 그렸다. Ⓒ 퓰리처상 홈페이지

경찰에게 의심받는 피해 소녀 

성폭행 사건을 다룬 기사 제목에 ‘믿을 수 없는’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뭘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실화라는 점도 있지만, 피해자들의 진술이 ‘믿지 못할’ 이야기로 치부되는 현실을 꼬집기 위한 것이다. 2008년 8월,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하는 열여덟 살 소녀 마리가 워싱턴주 린우드시의 한 경찰서를 찾아온다. 마리는 태어나서 자신의 친아버지를 딱 한 번 만났고, 8살 때부터 7종류의 약물을 접했으며, 형제들과 뿔뿔이 흩어져 여러 양육기관을 전전해왔다.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처지. 그런 마리가 그나마 의지해온 두 위탁가정의 ‘엄마들’은 마리가 성폭행 상황을 설명할 때 지나치게 침착했다거나, 평소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는 등의 이유로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한다. 담당 경찰관은 마리와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에게 ‘자백’을 요구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거짓말쟁이 고아 소녀’가 아니었다. 기사는 그녀의 내면을 조명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고도 생기를 잃지 않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밝고 섬세한 소녀가 마리였다. 18살이 된 마리는 양육시설 출신 청소년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참이었다. 희망찬 새 출발을 꿈꾸던 마리를 덮친 비극은 끔찍한 성폭행뿐 아니라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무서운 현실이었다. 마리를 담당한 경찰은 39세 남성 메이슨인데, 성폭행 사건을 고작 한두 번 다뤄봤을 뿐이었다. 성폭행 피해자들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범죄 상황에 대한 기억이 불명확하고, 진술을 번복하는 경우가 많다. 메이슨은 이런 ‘사소한 착각’을 이유로 마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한다. 마리는 자신을 의심하는 경찰관 앞에서 위축되고, 자신을 믿지 않는 위탁모들에게 버림받은 기분을 느낀다. 경찰의 회유에 못 이겨 진술을 번복하고 난 뒤에는 친구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고 자살 충동까지 느낀다.

마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이, 두 여성 경찰관은 미제 성폭행 사건들의 실체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다. 시간상으로는 3년이라는 간격이 있지만 기사는 병렬로 나뉘어 전개된다. 독자들은 별개로 보이는 두 사건이 조금씩 한 줄기로 엮여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2011년을 살고 있는 형사 갤브레이스와 헨더숏이 잡은 범인이 바로 마리 성폭행범과 동일인이기 때문이다. 2009년에 강간 위증 혐의로 유죄협상을 하고 소송비용까지 내야 했던 마리는 훗날 갤브레이스와 헨더숏이 진범을 잡으면서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게 된다.

완전 범죄 노린 연쇄 성폭행범 

두 형사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형사 갤브레이스는 2011년 콜로라도주 골든시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현장에 나갔다. 사건은 단순했다. 범인은 피해여성이 잠든 틈을 타 창문으로 집에 들어왔고, 자고 있던 그녀를 뒤에서 덮치고, 거실에 있던 신발 끈으로 그녀의 손을 묶은 후 4시간 동안 성폭행했다. 범인은 이를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면서 “경찰에 신고하면 온라인에 사진을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범행이 끝난 후 그는 피해자에게 이를 닦고 샤워하도록 시킨 뒤 침대 시트를 들고 사라졌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계획적 범죄에 갤브레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잡기 쉽지 않겠군.”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범행 현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범인이 남긴 것은 거의 없었다. 결정적 물증이 될 디엔에이(DNA)를 채취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난항에 빠진 사건을 구한 건 협력이었다. 갤브레이스는 콜로라도주 웨스트민스터시에서 역시 경찰관으로 일하는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 그곳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걸 알게 된다. 웨스트민스터에서 해당 사건을 담당한 경찰이 바로 헨더숏이었다. 미국 전체 경찰조직에서 여성은 13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성폭행 피해자들을 위해 나선 여경들의 연대는 빛을 발했다. 두 사람은 한 달 남짓 동안 비슷한 성폭행 사건을 네 건이나 찾아낸다. 2009년 10월 오로라시, 2010년 7월 레이크우드시, 2010년 8월 웨스트민스터시, 2011년 1월 골든시에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범행 장소를 지도에 표시하니 콜로라도주 덴버시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진술과 증거를 통해 경찰은 네 사건 모두 동일범의 소행임을 확신했다. 피해자는 60대 노인부터 20대까지 다양했지만, 범행 수법은 모두 같았다.

완전 범죄를 노린 범인은 그러나 사소한 증거에 꼬리가 밟혔다. 레이크우드시에서의 범행 3주 전, 한 시민으로부터 “수상한 트럭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순찰나간 경찰차 카메라에 범인의 차 번호판이 찍혀 있었다. 갤브레이스는 영장을 받아 차 주인의 집을 수색했고, 집 안에서 피해 여성들의 속옷을 발견했다. 범인은 레이크우드시 주민 마크 패트릭 오레리(32)로, 키 185센티미터(cm)에 몸무게 100킬로그램(kg)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그는 군인 출신이었고, 정리정돈의 달인이었다.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치밀한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거기 있었다. 2011년 8월 오레리는 법정에서 무려 327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법에 적힌 최대치였다. 오레리는 경찰부서들이 서로 잘 소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구역을 바꿔가며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제 마리는 오명을 벗었지만, 중요한 건 그다음부터다. 워싱턴 린우드 경찰 책임자 스티븐 젠슨은 마리 사건이 어떻게 다뤄졌는지에 대해 외부 감사를 맡겼다. 성범죄 전문가 그레그 린타는 “마리 사건은 명백하게 경찰이 성폭행 피해자를 몰아붙여 거짓 진술을 받아낸 사건”이라고 혹평했다. 당시 마리는 유죄협상 결과 정신과 상담과 보호관찰을 받아야 했고, 소송비용으로 500 달러(약 55만 원)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보고서가 나온 이후에도 처벌받은 경찰은 없었다. 다만 경찰들은 이제 성범죄에 대한 별도의 강의를 듣는다. 마리 사건을 맡았던 경찰관 메이슨은 마리에게 뒤늦게 사과했다. 마리는 위탁모들과 오해를 푼 뒤 화해했고, 시에 소송을 걸어 배상금 15만 달러(약 1억7천만 원)를 받아냈다. 지금은 다른 시에서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다고 한다.

좋은 경찰과 좋은 기자의 공통점 

여성 경찰들이 ‘환상의 투캅스’였다면, 기사를 쓴 기자들 또한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켄 암스트롱은 과거 <시카고 트리뷴> 기자로서 두 차례 퓰리처상을 받았던 실력파고, 현재 소속된 <마셜 프로젝트>는 ‘형사사법제도의 정의구현’을 목표로 2013년 출범한 비영리언론이다. 크리스티안 밀러는 비영리 탐사전문매체 <프로퍼블리카> 소속 기자다. 2007년 출범한 <프로퍼블리카>는 온라인매체로서는 드물게 퓰리처상을 거듭 수상하며 주목받고 있는 언론사다.  

   
▲ 2016 퓰리처상 해설기사부문을 수상한 <마셜 프로젝트>의 켄 암스트롱(가운데)과 <프로퍼블리카>의 크리스티안 밀러(오른쪽). Ⓒ 퓰리처상 홈페이지

애초 밀러와 암스트롱은 각각 다른 사건을 취재 중이었다고 한다. 밀러는 콜로라도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암스트롱은 워싱턴주의 사건들을 몇 달째 조사하고 있었다. 밀러가 콜로라도주에서 워싱턴주로 취재 반경을 넓히면서,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마치 형사들이 협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두 기자는 취재 후기에서 “경찰이 수사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고,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추리소설보다 강렬한 기사 한 편을 다 읽고 나면, 독자들은 확신하게 된다. 좋은 경찰이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 듯, 좋은 기자도 사회를 살 만하게 바꾼다고.


매해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고 실험적인 보도를 한 기자들에게 주어지는 퓰리처상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언론인들의 주목 대상이다. 공공서비스, 탐사보도, 지역보도 등 14개 부문에서 선정되는 수상작은 내용과 형식 등 여러 면에서 저널리즘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비뉴스>는 역대 퓰리처상 수상작 중 우리나라 독자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가질 만한 보도를 골라 격주로 소개한다. (편집자)

편집 : 박수지 기자

[신혜연 기자]
단비뉴스 전략부, 국제부, 시사현안부 신혜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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