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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공금 10억 엔 횡령한 리카의 속사정
[미디어비평] 영화 '종이 달'에 나타난 욕망과 자본주의
2017년 06월 28일 (수) 18:01:48 박경난 PD pkn226@naver.com

“행복하지만 언젠가는 끝나겠다고 생각했어요.” - 리카

<종이 달>의 주인공 리카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이고 행복하다. 4년 동안 은행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다 얼마 전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남편은 출장을 갔다 오며 고급 시계를 선물해 줄 만큼 금전적으로도 풍요롭다. 하지만 정작 리카가 은행에서 하는 일이나, 리카가 번 돈으로 선물해준 저가 시계는 무시한다. 과시적인 남편과의 관계에서 리카는 무의식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자신을 좋아해주는 대학생 코타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정작 자신을 믿어준 고객의 돈을 횡령한다. 그는 이 행복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 남편과의 관계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리카. ⓒ 영화 <종이 달> 스틸컷

“계속 참고 있는 것도 바보 같아서요.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잖아요.” - 아이카와

아이카와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은행 창구 직원이다. 일보다는 쇼핑에 관심이 많은 아이카와는 돈의 유혹이나 유부남과의 불륜을 리카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은행 차장과 불륜을 저지르고, 백화점에서 사고 싶은 신상을 위해 차장의 전표 조작을 돕는다. 아이카와의 고백은 리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아이카와는 어느 날 갑자기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공무원과 결혼한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른 채 여러 관계를 전전하며 눈앞의 욕망을 해소한다.

“뭐든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할지 생각했더니 야근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스미

스미는 25년 동안 은행에서 일한 베테랑이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경제저널을 읽을 만큼 은행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제 전근과 퇴사를 권유받는다. 그는 자신이 계속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자료를 검토하던 중 리카의 횡령을 발견한다. 이 일로 스미는 은행에서 계속 일하게 된다. 그는 모든 관계를 일에 집중해왔고 결론적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일을 빼면 무엇이 남는지 모를 정도로  어딘가 결핍되어 있다.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종이달>의 인물들

영화 <종이 달>은 평범한 은행원 리카가 연하의 대학생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은행 문서를 위조해 돈을 빼돌리는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심리 서스펜스 영화다. 원작 소설을 각색하면서 원작에는 없는 두 인물이 영화에 추가돼 리카의 심리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카를 포함해 은행에서 일하는 세 여성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어딘가 결여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 스미와 리카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모두 어딘가 결여되어 있다. ⓒ 영화 <종이 달> 스틸컷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식 사유체계에서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다. 이런 이성적 존재론은 프로이트가 본능이라는 욕망과 어우러진 인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혁명적 변화를 겪는다. ‘나’는 유아기를 지나 사회적 존재로 진입하면서 사회가 금기하는 유아기의 욕망을 억압하지만 그 욕망이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른이 되이서도 억압된 상태로 무의식에 남아 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프로이트를 부활시킨 자크 라캉에게 ‘나’는 욕망하는 존재다.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다. 인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유아기의 상상계로 시작해서, 거울 속의 ‘나’가 허구임을 인식하고 자아와 대상이 분리되는 상징계를 거쳐,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는 실재계로 나아간다. 실재계를 살아가는 ‘나’는 결핍을 충족시켜줄 대상을 욕망한다.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과 동일시하는 순간, 그 동일시가 허구임을 인식하고 새로운 결핍과 욕망을 느낀다. 라캉에게 인간은 결핍-욕망–충족–결핍-욕망-충족의 순환고리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다.

‘나’는 그 자체로 완결된 존재일까? 라캉은 ‘노’라고 대답한다. 만약 그렇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한 철학자들이 인간 존재론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렇다면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안정적인가? 그런 관계는 일시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거의 언제나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결핍을 느낀다.

‘나’라는 주체 속에는 ‘바라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주체가 있다고 라캉은 말한다. 데카르트식 주체는 보기만 하는 주체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위험하다. 아직도 상상계에 머물러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상계의 고착에서 벗어나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새로운 대상을 향해 가는 반복 없이 삶은 지속될 수 없다. 라캉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고립된 주체는 히틀러처럼 역사를 광기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리카는 어떤 결핍과 욕망을 추구했나

주인공 리카는 고급 브랜드 화장품을 사면서 돈이 부족하자 살짝 고객의 돈을 유용해 쓰고 이내 메꾼다. 이후 연하의 대학생 애인 코타가 학비로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알자 리카는 돈을 빌려주겠다고 한다. 불륜이 이어지면서 몇백만 원짜리 호텔방에서 묵고 수십만 원짜리 밥을 먹고 코타가 살 집을 얻기도 하고 컴퓨터도 사준다. 리카는 고객이 입금해 달라는 돈을 빼돌리고 전표 조작으로 공금을 횡령한다.

   
▲ 대학생 코타와 불륜을 저지르는 리카. ⓒ 영화 <종이 달> 스틸컷

리카의 욕망은 육체적 쾌락이었을까? 단서는 영화 첫머리에 있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맺어준 화상 입은 동남아 소년을 후원하기 위해 리카는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친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남자를 도와주기 위해 돈을 훔친 것이다. 현재의 리카는 은행 공금을 횡령해서 연하남을 도와주고 있다.

그것은 리카의 삶에서 '탈선'의 이유가 사랑에 대한 희구나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리카는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결핍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돈을 통해 이 결핍을 충족시키려 한다. 존재감 회복 욕구나 권력욕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은 훔치거나 횡령한 돈이다. 이것은 다른 타자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결핍을 태동시킨다. 리카는 자신의 행복(충족)이 언젠가 끝날 걸 알았다. 진짜가 아닌 가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리카는 파국을 맞이한다. 행복을 찾지 못한 채 끝난 영화의 결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충족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영화에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 있다. ‘여기까지’라는 스미의 말에 리카가 은행의 창문을 깨고 달아나는 장면이다. 도망친 리카는 태국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후원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성인이 되어 딸과 함께 구아바를 팔고 있었다. 자신이 가짜로 했다고 생각했던 어린 날의 선의가 현실이 된 것을 안 순간 리카는 혼란에 빠진다. 옛날 일본 사진관에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 놓고 그 밑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가족, 연인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일본에서 종이 달은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보낸 행복한 한때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 '여기까지'라는 스미의 말에 창문을 깨고 달아나는 리카. ⓒ 영화 <종이 달> 화면 갈무리

종이달은 가짜지만 진짜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결핍-욕망-충족-결핍의 순환고리 속에 존재한다. 그 순환 속에서 충족의 시간은 극히 짧은 순간일 뿐이고 우리는 새로운 결핍을 느낀다. 리카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결핍을 느끼고 코타와의 관계에서 존재감을 회복한다. 하지만 그것은 종이 달이었다. 이 고리에서 도망친 곳에서 리카는 뜻밖에도 종이 달이 진짜 달로 변한 현실을 만난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우울한 전체 색조 속에서도 실낱같이 가늘지만 밝은 색조를 한 점 남겨놓고 있다.

팝송 <It's Only A Paper Moon(종이 달)>은 이렇게 말한다. “그림으로 그린 바다에 뜨는 종이 달도, 그대가 나를 믿어 주면 진짜로 보이지요. (…) 그대가 나를 믿어 주면 진짜가 되어 버리지요.”

종이 달로 치장한 짧은 순간의 충족이지만 그것은 소중한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 순간에는 종이 달이 진짜 달이 되는 것이다. 충족의 순간은 희미하고 짧은 추억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살고 싶게 만드는 마법의 돌이 아닌가? ‘진짜 관계’가 사라진 현대사회에 영화 <종이 달>이 던지는 질문이다. 


편집 : 박수지 기자

[박경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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