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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뒤에 가려진 저임금, 성희롱
[기획] 심각한 방송작가 노동실태
2017년 03월 24일 (금) 15:35:54 박진영 기자 parkbingsu@naver.com

ㄱ(26)씨는 중학생 때부터 글쓰기에 매달렸다. 그녀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주변을 관찰하고 적었다. 그리고 재미있게 각색해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자연스레 문예창작과에 들었다. 졸업을 앞두고 방송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송작가 3년 차. 그러나 이제 그녀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약속 시각보다 1시간이나 늦은 밤 11시가 되어서야 ㄱ씨를 만날 수 있었다. 카페에 들어온 그녀의 얼굴에 피곤이 묻어났다. “오늘은 그나마 일찍 마친 날이에요. 보통은 12시를 넘겨서 퇴근하거든요.” 인터뷰를 요청한 게 미안할 정도로 그녀는 힘들어 보였다. 조심스레 방송작가의 업무에 관해 묻자 한숨부터 쉰다. “흔히 갑을 관계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방송사에서 ‘을 중의 을’이에요.” 그녀가 들려준 방송작가 업무 실태는 충격적이다.

   
▲ 방송작가가 참여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 녹화 현장. ⓒ 한국콘텐츠진흥원

방송 작가는 슈퍼맨?

“방송작가? 돈 잘 버는 직업 아닌가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송작가는 드라마작가다. 이름있는 드라마작가의 경우 회당 수천만원의 원고료를 받는다. ㄱ씨는 드라마가 아닌 예능·시사교양·보도 프로그램과 같은 비드라마 방송작가다. 업계에선 이들을 ‘구성작가’라고 부른다. 이름부터 다르듯, 하는 일도 드라마작가와 다르다.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구성부터 취재, 섭외, 자료정리, 촬영일정 계획, 프리뷰, 자막달기 등 업무 전반을 도맡는다.

업무의 양이 많은 만큼 업무 강도가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밤샘 야근은 기본이고 집에도 일거리를 싸 들고 간다. 일이 너무 힘들어 구성작가의 절반이 1년 안에 그만둔다고 한다. ㄱ씨는 그래도 참고 버텼다. 힘들게 만든 프로그램이 처음 방송될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어서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일을 시작한 지 보통 1년이 지나면 막내(신입)작가를 벗어나 서브작가로 올라선다. 이때 비로소 프로그램 안에서 5분 내외의 짧은 코너를 맡아 진짜 대본을 쓴다.

“저희는 경력에 따라 막내작가, 서브작가, 메인작가로 분류를 해요. 죽을 듯이 힘든 5~6년의 막내, 서브시절을 거치면 메인이 되는 거죠. 메인이 되기 위해 당연히 힘든 일도 참고 견뎌야만 하는 줄 알았어요.”

100만원 월급보다 힘든 것은 인격모독

정작 ㄱ씨가 들려준 막내작가의 업무조건은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방송작가 3년째인 현재, 그녀의 월급은 약 130만원. 첫해에는 90만원을 받았다. 실제 지난해 언론노조가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를 보면 설문조사에 참여한 644명의 응답자 중 1년간 총 수입이 ‘1000만원 이상 ~ 2000만원 미만’이라는 응답이 53.1%(342명)로 가장 많았다. 이들의 평균 수입은 1558만원이었다. 이는 지난해 직장인 평균 연봉 3250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 고향인 여수에서 올라와 서울생활을 하는 ㄱ씨는 월세 50만원이 가장 아깝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에서는 잠만 자는데 월급의 거의 절반이 집값으로 빠지니깐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그러나 적은 월급보다 더 힘든 건 인격모독이다.

ㄴ씨(24)는 지난해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었다. 방송계에 만연한 성희롱을 견딜 수 없어서다. 외주제작사 소속이었던 ㄴ씨는 같이 일하던 PD에게서 수차례 성적인 농담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회식자리에서 술 따르기를 강요하는 일이 계속되자 모멸감과 동시에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회의를 가졌다. 이는 비단 ㄴ씨만의 일이 아니다.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58.9%(362명)의 작가가 성희롱이나 성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방송국 조직문화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게다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방송작가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성폭력뿐만이 아니다. 방송작가는 욕설, 폭행, 사적 심부름 등 온갖 인격모독에 시달린다.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생길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일을 그만두기 전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한 ㄴ씨는 “원래 여기가 그래, 어쩔 수 없어”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 언론노조가 지난해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보고서. ⓒ 언론노조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니라고요?

방송작가가 이토록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9일, 방송작가유니온(준) 활동을 하는 이향림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방송작가는 처음 방송국과 계약할 때 계약서조차 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냐고요? 그냥 구두계약으로 하는 거죠. 실태조사 보고서 보시면 근로표준계약서를 쓴다고 응답한 사람이 6%라고 나와 있는데, 제 주위에 실제로 계약서 쓴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방송작가가 근로표준계약서를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방송작가가 근로자가 아니어서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방송작가는 이에 속하지 않는다. 방송작가를 독립성을 전제로 하는 창작활동에 종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드라마작가의 경우 방송국과 별개의 주체로 창작활동을 수행하고 저작권을 인정받는다.

문제는 구성작가다. 구성작가는 방송국이라는 사업장에 철저히 종속되어 프로그램 제작의 전 과정에 깊이 참여하고 있으며, PD의 직접적인 업무수행 지시에 따라 일을 하고 있으므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이같은 점은 방송국이 더 잘 안다. 그럼에도 제작비 절감이라는 이유로 방송작가 노동실태에 관심 두지 않는다. 방송작가들의 인권은 나날이 나빠진다. PD의 말 한마디에 잘리고, 몇 달 치 임금체불을 당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이향림 작가는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생소한 단어를 소개했다.

“이렇게 저희같이 형식상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들을 특수고용 노동자라고 해요. 근로계약 대신 프로그램 한 건당 급여를 받는 방식으로 일을 하죠. 저희는 그 어떤 노동권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특수고용 노동자로 일하는 직업은 방송작가 말고도 많다. 학습지 교사, 생명보험 설계사, 택배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이다. 그 수만 해도 전체 취업자 중 10%에 달하는 2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모두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계약서도 쓰지 않고 적은 돈을 받으며 일을 하고, 퇴직금, 연차휴가, 4대 보험 등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앞서 인터뷰한 ㄱ씨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 것도, ㄴ씨가 인격적인 모독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을 찾지 못한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다. 상황 개선을 위해선 방송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방송작가들이 뭉쳐야 하는 이유

또 다른 방송작가 ㄷ씨(31)는 방송국의 위선적인 행태에 분노를 터트렸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의 임금체불·무급 인턴제도 등을 꾸준히 비판하는 방송국이 정작 내부의 상황은 모른 체하고 있어서다. 그래도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방송작가의 입장을 대변해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방송작가들이 뭉치고 있다. 5월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출범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이향림 작가는 작가노조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들려준다.

“이제껏 임금을 체불당하면 작가들은 참고 기다리거나 혼자 따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언론노조를 통해 임금을 체불한 사업자에게 전화로 따진 일이 한번 있었는데, 바로 임금을 지급하는 거에요. 놀라운 경험이었죠.”

   
▲ 5월 언론노조 작가지부 출범을 목표로 모임 중인 방송작가들. ⓒ 이향림

이 작가는 아직은 노조에 가입을 문의하는 방송작가가 적다고 전했다. 혹여 노조에 가입해서 방송국으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이다. 취재를 위해 먼저 인터뷰를 한 세 명의 방송작가가 모두 익명을 요구하고, 사진촬영도 허락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방송작가는 방송제작에 있어 핵심적인 존재다. 그럼에도 이들은 수 십 년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인기프로그램 인기스타, 인기 PD의 화려한 그늘 아래 가렸다.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조차 지켜주지 못하면서 문화콘텐츠 강국을 자처하는 일은 너무나 부끄럽다. 뭉쳐야 달라진다. 방송작가들의 많은 참여가 출발이다.

   
▲ 오는 28일 국회에서 방송작가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토론회가 열린다. 방송작가의 많은 참여가 절실하다. ⓒ 언론노조

오는 3월 28일 방송작가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토론회도 열린다. 언론노조, 노동부, 한국PD연합회 관계자가 모여 방송작가들로부터 수집한 노동인권침해 사례를 공유하고 개선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방송작가들이 많이 참여할수록 물론 효과가 크다. 언론노조(02-739-7285),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mediawriter)로 문의하면 된다.


편집 : 강민혜 기자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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