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나’

▲ 최치명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님의 자부심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식이 아니다.”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가 계약직이라는 자신의 처지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 순간에 나온 대사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누군가의 친구로 또는 선배로 살아간다. 관계라는 설정을 통해 나를 인식한다. ‘남이 아닌 자기 자신’. 비로소 나에게 다가오는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를 본다.

하지만 관계만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관계망의 그물에서 탈출하려고 이따금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은 내 인생과 맞닿을 수 있기에.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 환경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현실에 맞닿아 있는지, 과거의 나를 떠올리고 미래의 나를 그려보며 순간의 상념에 빠지곤 한다.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나는 온전한 나만의 개성을 발현할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개성이라는 것도 자연스레 생긴 것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의도로 만들어진 산물은 아닐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E. H. Carr)의 말처럼 시간의 경과로 만들어진 나는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나로 거듭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 사이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1990년대만 해도 어색했던 세계화는 우리 삶 속에 원래부터 존재한 것처럼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화라는 환경은 개인의 개성에 영향을 미치며 나를 인식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과연 나만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일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나에게 이따금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얼마 전 영국에서 발생한 ‘브렉시트(Brexit)’도 그런 사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래 세계화와 중앙집중화 등으로 생긴 혜택이 최상위계층으로 집중되었다. 격차가 벌어진 중산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선동정치를 만나면서 이민자 문제 등 큰 걱정거리를 유럽사회에 안겨주었다.

브렉시트에서 나타난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이나 자유무역에 대한 회의감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대선후보 트럼프한테서도 보인다. 1970년과 2015년 통계는 미국 내 총소득 중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소득이 51%에서 42%로 감소한 것을 보여준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이 저소득 백인인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민자 탓에 자기 일자리와 소득이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심리가 대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경제민주화 요구도 이런 이유로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 불황으로 조성된 노동환경은 취업을 해야 하는 ‘나’에게도 선택의 폭에 영향을 미친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나’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런데 미디어 중에는 경제 불황 속에서도 최상위계층과 정치인들과 혜택을 공유하며 이익을 과점하는 곳도 있다.

▲ 사회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할 언론은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경제의 논리로 논조가 달라지기도 한다. ⓒ pixabay

사회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할 언론은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경제의 논리로 논조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동영상에 대한 언론의 반응도 그렇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나로서는 그 속에서 나를 찾기가 쉽지 않음을 느낀다. 나는 심리적 거리감으로 한 걸음 떨어져 사회를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그런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나 자신이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빅 브라더’를 통한 당의 통제에 저항하지만, 이내 발각되어 무기력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오늘날 ‘빅 브라더’로 대표되는 것은 무엇일까? GPS 위치추적시스템과 CCTV 통제시스템을 비롯한 정보기술(IT)의 발달로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우리 주변을 감시할 수 있는 환경 자체이지 않을까? 뉴미디어 시대에 정보기술은 세계와 나를 직접 연결해주고,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을 통제하려는 사회에 미디어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사생활 보호와 사회질서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할까? 나는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수 미디어 그룹이 세계 미디어 시장을 쥐고 흔드는 것은 저널리즘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들은 정치권뿐 아니라 금융시장과 결탁하여 본래 역할보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한다. 영국의 <가디언>과 같은 소수의 언론만이 자본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의 욕구와 저널리즘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신뢰를 받는다. 한국에도 <미디어오늘>이나 <오마이뉴스> 같은 대안언론이 등장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기성언론에 큰 충격은 주지는 못하고 있다.

18세기의 ‘보이지 않는 손’은 21세기의 ‘보이지 않는 손’을 위협한다. 개인과 사회의 중간자 구실을 하는 언론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정부의 사회 통제와 자본가의 시장 독점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이런 환경에서는 나 자신이 정체성을 온전히 유지하기란 어렵다. 21세기의 ‘보이지 않는 손’인 저널리즘이 제 구실을 못한다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은 지도와 나침반이 없는 방황이 될 것이다.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18세기와 21세기를 지배해온 ‘보이지 않는 두 손’의 균형에 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8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경북대 대학원 졸업생입니다.

* 첨삭 과정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풍선도움말로 첨삭글 보는 방법>
O 워드2007인 경우
메뉴=>검토=>변경내용표시=>풍선도움말=>풍선도움말에 수정내용표시

편집 : 신혜연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