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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에 깃든 성찰
[상상사전] ‘나’
2016년 08월 31일 (수) 10:16:57 송윤아 danbi@danbinews.com
   
▲ 송윤아

서로 닮은 두 단어를 볼 때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 ‘사람’과 ‘사랑’이라는 단어도 그 중 하나다. 무슨 관계일까? 두 단어의 모양이 유사한 게 어원이 같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마음을 ‘사람’과 유사하게 ‘사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두 단어에는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라는 옛사람의 성찰이 담겨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와 ‘남’은 어떨까?

‘나’라는 단어는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란 뜻을 지닌다. 사전에서는 ‘남이 아닌’이라는 수식어귀를 붙여 나와 남의 차별성을 부각한다. 하지만 두 단어의 외형은 참 닮았다. 받침 하나에 나가 남이 되고 남이 나가 된다. 영어에서 나(I)와 남(others)의 낱말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옛사람들이 나와 남의 유사성에 주목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남’이라는 단어에는 그 둘이 유사한 존재라는 자각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무엇 때문인지 그런 자각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민중은 개∙돼지’라던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발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게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다”라는 부분이다. 그는 ‘나’가 아닌 ‘남’의 자식이니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남이 나와 유사한 존재라는, 똑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나와 남을 철저히 구분했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 나와 남을 철저히 구분하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 flickr

정도가 다를 뿐이지 나향욱과 같은 시선은 사회에 만연하다. 차디찬 바닷속에서 가족을 잃어야 했던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외침을 냉소하고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 경비원이 분신한 사실에는 덤덤히 반응하면서 집값이 내려갈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신자유주의적 시장 규율을 내면화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효율성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한 경쟁체제에 익숙해진 우리의 머릿속에 남이 들어설 공간이 얼마나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먹고사니즘’은 ‘남’의 아픔과 고통도 집어삼킨 지 오래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은 유사성을 자각하는 게 공감의 실마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는 ‘남’ 역시 ‘나’와 유사한 존재라는, 똑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남을 나와 철저히 구분하려 든다. 여기서 공감의 부재, 타인을 향한 감수성의 부재가 발생한다. 그것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연대를 방해하고 사회에 불행을 가져온다.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유족,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 사회적 약자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는 데서 변화는 시작된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측은지심은 남의 불행과 고통을 차마 그대로 보고 넘기지 못하는 마음, 곧 타인을 향한 공감이다. 맹자는 측은지심을 확충하는 게 난세를 바로잡기 위한 기본이라고 보았다. 세상의 변화가 타인을 향한 공감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8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서울시립대 4학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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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박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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