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사회적 약자를 향한 화살

▲ 박장군 기자

스페인내전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폭압에 맞서 수많은 시민이 팔을 걷어붙였다. 전 세계에서 3만 명이 넘는 의용군이 앞다퉈 총을 잡았다. 조지 오웰, 헤밍웨이, 피카소 같은 문화 예술인들도 이베리아반도에서 파시즘의 만행을 글로, 그림으로 담아냈다. 반지성의 상징, 프랑코 곁에는 파시즘 정권 말고 또 하나의 지원군이 있었다. ‘레굴라르’라 불리던 모로코 리프족 용병이다. 이들은 프랑코 진영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 학살과 집단 강간을 저질렀다. 십여 년 전 모로코 독립전쟁 당시 자신들을 잔혹하게 말살한 스페인군의 사령관이 프랑코였다는 사실은 잊혔다. 그들의 칼은 프랑코가 아닌 약자를 겨눴다. 프랑스 사회철학자 프란츠 파농의 ‘분노가 문제의 근원이 아닌 약자를 향해 표출된다’는 수평폭력의 한 단면이다. 80년 전 레굴라의 모습은 대선을 5개월 앞둔 미국 공화당 트럼프와 지지층을 떠올려 준다.

트럼프의 골수지지자들은 레굴라르가 자행한 수평폭력의 판박이다. 자신보다 사회적 약자인 이민자와 소수인종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겨눈다. 중·하위층 노동자들은 트럼프 같은 상위 1%가 부의 대부분을 가져갔기 때문에 팍팍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놓치고 만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자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분석한 크레디트 스위스의 ‘2015 세계 부 보고서’는 강 건너 불이다. 트럼프가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 축소와 부자 감세 정책을 지향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여기에 눈감고 이민자에게 화를 푼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 트럼프는 같은 범주에 있는 이민자와 자기 지지자들을 구분 짓고, 마약·범죄·강간을 이민자 탓으로 돌리면서 손쉽게 지지율을 끌어 올린다.

▲ 이민장벽에 찬성한 공화당도 길 잃은 수평폭력의 방조자다. ⓒ 연합뉴스TV 뉴스 갈무리

방향을 잃은 수평폭력은 부의 불평등을 가리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120유로짜리 나이키 운동화 인건비가 2.5유로에 불과한 상황에서 일자리를 이민자들에게 뺏길까 봐 걱정하는 건 어리석다. 2.5유로를 두고 노동자들이 다투는 사이, 나머지 돈은 다국적 기업과 부자들의 지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기득권층이 수평폭력으로 노리는 효과는 민주주의의 위기와도 맞닿는다. 편중된 부는 미국식 천민민주주의에서 부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운다. 2010년 거대 금융·산업회사들은 오바마의 금융개혁안을 깨뜨리기 위해 400여 명의 로비스트를 동원했다. 그 바람에 법 제정에만 무려 3년이 걸렸고 398개 조항 중 3분의 1에 불과한 148개만 통과되는 데 그쳤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중략)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일부다. 파농의 인식처럼 계급적 수평폭력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지만, 김수영은 수평폭력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는다. 3년간의 내전으로 스페인에서는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25만 명 이상이 망명길에 올랐다. 트럼프 지지층의 겉모습을 벗겨내면 미국 사회 불평등의 민낯이 드러난다. 트럼프가 정말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전 세계 양심과 이성이 의문을 품는 이유다.


세 명대 저널리즘 스쿨 1학기에 개설되는 인문교양수업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담당교수 김문환)].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한 서양 문명사 강의가 펼쳐집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 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경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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