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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 거닐며 근대사를 되새기다
[지역∙농업이슈] 도시 재생 ③ 대구 근대문화골목
2016년 03월 15일 (화) 16:36:17 손은민 기자 smqaz@naver.com

'골목은 한 도시가 변화해온 과거의 시간 동안 사람의 생활사가 고스란히 집약된 곳이자 과거의 생활사가 현재진행형으로 지금과 맞닿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 골목을 따라 세월을 건너며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치고, 실핏줄처럼 얽힌 골목들의 이야기가 어느 모퉁이에서 한데 모여들면 어느 날 거대한 역사드라마가 된다.'

구청장이 골목을 소개하는 책을 쓴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윤순영 대구 중구청장이 <골목, 별이 되다>를 쓴 것은 그의 관심사 덕분일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대구 중구의 골목들이 만들어온 이야기들이 그만큼 풍성하기 때문일 터이다.

대구에 유독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이유

중구는 대구의 지리적 중심임과 동시에 오랜 세월 대구의 정치·경제·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해온 역사적 중심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 부족국가를 이루었던 달구벌의 성터 달성 토성, 일제강점기 영남지역의 행정·산업·군무를 총괄하던 경상감영, 조선 3대 시장으로 성장한 서문시장, 구한말 조정이 기울고 읍민들이 장사를 통해 민생고를 해결하면서 급성장한 약령시, 해방 후 미군 부대가 들어서면서 조성된 전국적 철물·기계공구상 거리 북성로 등이 화려했던 도심을 증명한다.

대구의 근대 공간들은 한국전쟁의 참화를 입지 않아 수백 년간 옛 모습을 그대로 지탱해온 곳이 널려있다. 대구의 도심을 거닐면,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 공간을 거닐었던 이들의 삶의 흔적이 중첩되며 문화유산들이 점점이 이어진다.

대구시와 중구청은 1990년대 이후 도심 공동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죽어가던 대구 도심을 '골목'과 '스토리텔링'이라는 키워드로 재생사업을 벌였다. 한 시대를 살아간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대구의 근대적 공간과 역사를 생생하게 풀어내 재구성하고, 그 공간들을 ‘골목’으로 연결했다. 그렇게 탄생한 <대구 중구 골목투어>는 5개의 코스로 이루어진다. 제2코스인 ‘근대문화골목’은 동산 청라언덕~선교사 주택~3·1만세운동길~계산성당~이상화·서상돈고택~제일교회~약령시~종로~진골목~화교협회로 이어지는 가장 인기 있는 구간이다.

   
▲ 대구 근대문화의 발자취를 주제로 한 골목투어 제2코스, 길이는 1.64km로 다 돌아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주요 장소마다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 중구청

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 동산선교사주택

근대문화골목 투어는 계산동 남쪽 미국인이 사는 양옥 수십 채가 우뚝 솟은 청라언덕에서 시작된다. 20세기 이전 '황무지'였던 이곳이 ‘대구의 몽마르트’가 된 것은,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애덤스와 존슨이 학교와 병원, 신학대학을 세우면서부터다. 이곳에는 당시 거주하던 선교사들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스윗즈(Switzer), 블레어(Blair), 챔니스(Chamness) 선교사 주택이 언덕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언덕 위 선교사 주택들은 벽면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냈는데, 이곳이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의 청라언덕이라 불리게 된 이유다. 이곳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로 시작되는 가곡 '동무생각'의 배경이기도 하다. 동산동에서 태어나 계성학교에 다닌 작곡가 박태준이 마산 창신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 국어교사인 노산 이은상에게 첫사랑 얘기를 들려줘 작사가 이루어지고 노래로 탄생했다.

현재 세 선교사 주택은 각각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또 선교사 주택 마당 건너편에는 은혜 정원이라는 묘지가 있는데, 18년간 교육 선교에 헌신한 스윗즈 선교사의 무덤을 포함해,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순직한 선교사와 가족들이 잠들어 있다.

   
▲ 담쟁이덩굴로 덮여 있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 ⓒ 손은민

거사를 위한 비밀통로, 3·1만세운동길

선교사 주택을 돌아 나오면 언덕 위에서 계산성당 방향으로 이어진 아흔 개 돌계단이 있다. 이곳은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대구에서도 일어난 당시의 역사적 현장중 한 곳이다. 대구에서는 각지에서 장꾼들이 모여드는 서문 큰 장이 열렸던 3월 8일 거사가 일어났다.

손수자 골목문화해설사는 “90계단은, 지금 사라졌지만 당시 소나무 숲이 울창해, 거사에 동참하는 학생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집결장소로 갈 수 있는 비밀통로 구실을 했다”고 설명했다.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1천여 학생과 군중이 참여했는데, 당시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이 특히 많이 참여해 ‘학생의거’라고도 불린다.

   
▲ 3·1만세 운동길. 돌계단 옆으로 3월 8일 거사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손은민

100년의 역사, 계산성당

3·1만세운동길을 따라 내려오면 횡단보도를 마주하고 우뚝 솟은 쌍탑과 고풍스러운 외관의 계산성당이 보인다. 조선시대 대구는 박해를 피해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일찍이 큰 교세를 형성했는데, 현재도 계산성당을 중심으로 대구·경북지역 가톨릭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계산성당은 1899년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전소돼 1918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영남 최초의 근대건축물로 꼽히는 계산성당은 유명인사의 결혼식 장소가 되곤 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도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성당 내부에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이색적인데,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순교한 성인을 의미한다. 계산성당은 100년이 넘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됐다.

   
▲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 손은민

풍전등화의 나라 위해 일어선 두 인물 이야기

계산성당을 지나 계속 걷다 보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기와집 두 채가 보인다. 계산2가 84번지와 88번지의 이상화·서상돈 고택이다. 왼편에 보이는 집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으로 유명한 시인이 말년에 머물던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마당과 장독대 등으로 이루어진 목조 주택으로, 시인이 살았던 당시의 감나무 마당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상화는 대구고보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썼는데, 1919년 3월 8일에는 이만집, 김태련 등과 함께 대구 3·1운동을 주도했다.

   
▲ 이상화는 1940년부터 43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던 1943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 손은민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 원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반드시 국채를 갚고 국권을 회복할 것입니다.”

이상화 고택을 마주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고택이 들어서 있다. 고택에 들어서면 작고 조촐한 본채와 사랑채, 별채가 'ㄷ'자 모양으로 이어져 있다. 손수자 해설사는 “이곳은 당시 나그네들과 식객들이 묵어갈 수 있는 안식처였다”고 말했다. 실제 서상돈은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나, 천주교 선교활동을 하며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봄과 가을마다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누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을 지원했다.

   
▲ 서상돈 고택. 대구 제일 갑부였다는 말과 대비되는 소박한 안채는 그의 청빈한 삶을 짐작하게 한다. ⓒ 손은민

서상돈은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될 당시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1907년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반강제적인 차관이 1,300만 원에 이르자, 대구 광문사 부사장으로 있던 그는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는 제의를 하는데, 이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신호탄이 된다. 백성들이 스스로 시작한 경제적 구국 운동은 노동자, 농민, 부녀자, 학생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

과거 길에 오른 선비와 장꾼들이 북적이던 옛길

이상화·서상돈 고택이 마주한 골목길을 따라 나오면, 현대백화점 뒤편으로, 비좁은 길이 하나 쭉 뻗어있다. 지금의 동성로에 이어지는 이 길은 옛날 영남지방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영남대로다. 부산에서 대구, 문경새재, 충주, 용인을 지나 서울로 이어지는 이 길은 960리(380여 km)에 이르는데,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 하나였다.

영남대로를 중심으로 효종 9년(1658)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약령시가 자리하고 있다. 약령시는 당시 경상감사였던 임의백이 왕에게 품질 좋은 약재를 진상할 요량으로 경상감영의 객사 마당에 한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시장을 열면서 시작됐다. 전국에서 모여든 한의약상들은 1만여 명에 이르렀고 그 인근으로 주막과 객주는 물론 환전이나 금전 대부와 같은 금융기능을 하는 여각이 들어서면서 일대가 크게 번성했다.

   
▲ 약전골목 초입. 현재도 한약방, 약차 집 등 200여 개 한의약 관련 업소가 오랜 세월을 흔적을 안고 있다. ⓒ 손은민

도시재생은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

'현재의 도시는 전쟁 시기와도 같은 급변을 겪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옆 동네가 칸막이가 쳐지더니 주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 제가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 세대가 이 도시에서 일궈온 도시 역사와 지혜들을 미래세대가 아무런 감정 없이 삭제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건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10년간의 중구 도시재생사업 이야기를 담은 책 <대구의 재발견>이 지적하듯이 도시재생이야말로 도시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대구 골목투어의 시작은 2001년 대구지역 대학생들이 100여 일간 약전골목 주변을 다니며 대구문화지도를 그리면서부터다. 이들이 발굴해낸 골목 이야기들이 신문, 방송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됐고, 2002년 대구시 자원봉사센터에서 ‘골목문화해설사’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중구청이 함께하면서, 시민단체 거리문화시민연대가 창립했고, 지금의 다양한 골목투어 프로그램들이 기획됐다.

오늘날 대구 골목투어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대한민국 관광명소’로 꼽히게 된 데는 지역의 미래를 고민한 청년들의 노고가 컸다. 대구근대골목투어의 개발자이자 <대구의 재발견> 공저자인 권상구 중구도시만들기 지원센터 사무국장은 책에서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며 “골목투어는 단순히 관광사업을 넘어 도시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도시재생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고, 그것은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축적된 공간의 궤적 위에 현재의 상상력을 더해 도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모든 도시는 세월과 함께 변화한다. 한때 사람과 자본이 몰려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 한순간 몰락의 길을 걷기도 한다. 지역을 지탱하던 중심 산업이 쇠퇴하거나 도시 확장으로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면, 그곳은 더 이상 삶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죽은 장소로 전락한다. 숨을 쉬지 않는 도시에 새로운 기를 불어넣는 과정, 이를 ‘도시 재생’이라고 한다. 자본을 억지로 투입해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대신 장소가 가진 본연의 의미를 끄집어내 장소 정체성을 만든다. <단비뉴스>는 3회에 걸쳐 도시 재생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찾아간다. (편집자)

편집 : 서혜미 기자

[손은민 기자]
단비뉴스 지역농촌팀, 시사현안팀 손은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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