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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정치인에게 남긴 다산의 경고
[지역‧농업이슈] 남양주 다산 정약용 유적지 탐방
2015년 11월 30일 (월) 01:42:56 김영주 이명주 기자 yj0254@naver.com

정약용이 예순이 되어 그의 일생을 돌아보며 직접 쓴 묘지명에서 소개한 호는 사암(俟菴)이다. 사암은 ‘초막에서 기다린다’는 뜻인데,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그의 삶과 사상을 후손이 평가해주길 기다린다는 뜻이다.

다산으로 더 알려진 정약용이 태어나고(1762) 잠든(1836)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다산은 벼슬살이와 18년 유배생활, 그리고 말년에 고향살이를 하면서 쓴 책이 무려 503권에 이르러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학자요 저술가다. 그가 목민관을 위한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형리들을 위한 <흠흠신서>와 언어생활을 바로잡기 위한 <아언각비>를 쓴 곳도 남양주 생가다.

   
▲ ‘지역농촌보도실습’에 나선 학생들이 다산 정약용의 생가를 방문했다. 맨 앞에 선 이가 김시업 실학박물관장. © 하상윤

지난달 23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지역농촌보도실습’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김시업 실학박물관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다산유적지를 둘러봤다. 그런데 정약용 생가는 소박한 ‘초막’이 아니라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된 생가를 1975년 마당이 널찍한 20칸짜리 전통 한옥으로 복원한 탓이다.

강원 횡성에 있던 비슷한 집을 남양주로 옮겨왔고, 초가집은 매년 짚으로 지붕을 잇기가 어려워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초막에서 거대한 사상을 꿈꿨던 다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후손들의 평가를 기다린다’는 선생의 뜻은 이어져서 평일에는 오륙백명, 주말에는 이천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선생의 삶과 사상을 알기 위해 이 다산유적지를 찾는다.

개혁을 꿈꾸는 정조와 의기투합하다

22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다산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대과(大科) 공부를 시작했다. 성균관에서 다산은 과제와 반시, 정조의 ‘깜짝시험’에서 특유의 능력을 발휘해 정조의 눈에 들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壙中本: 무덤에 넣는 책)에서 “정조대왕의 총애가 남달랐고 칭찬함이 동년배들 가운데 특별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도 양식화한 글재주를 겨루는 과거에는 네 번이나 낙방하고 6년 만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다산이 벼슬길에서 목표로 한 사상은 공렴(公廉)이다. 그는 문과에 합격하면서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 곧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를 원하노라’는 시구절을 썼다.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랏일을 하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정조는 그에게 기대가 컸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정조는 기득권층인 노론을 견제하며 새로운 정치세력을 키워 개혁을 이루고자 했고, 정약용 같은 인재를 아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긴 뒤 아버지 묘를 자주 찾는 데 필요한 ‘배다리’의 설계자로 그를 지명했다. 다산은 임금의 어가가 안전하게 지날 수 있게끔 대형선 80여 척 위에 판자를 놓아 다리를 만들었다.

   
▲ 다산유적지에 정약용이 만든 배다리가 일부 복원돼있다. © 김영주

수원화성의 설계 또한 실학자로서 정약용의 진가를 보여준다. 정조로부터 수원화성을 설계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는 부친을 잃고 여막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여막살이를 하면서 성을 설계하고, 돌을 실어 나를 수레와 거중기를 만들었다. 어 냈다. 서학서를 통해 과학지식을 습득해온 정약용은 기술을 활용해 4만 냥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김시업 실학박물관장은 “백성들의 강제 노동이 당연시되던 시절에 역부들의 성과대로 임금을 지급한 발상의 전환이 무엇보다 놀라운 업적”이라고 말했다. 소수의 대지주 때문에 농사지을 땅이 없어져 고통받던 농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생활고를 덜어준 셈이다.

   
▲ 수원에 화성을 쌓을 때 노동력과 비용을 절약한 거중기가 복원돼있다. © 하상윤

민란 주모자 대신 토호와 아전을 처벌하다
 
민생을 우선시하던 다산의 강직함은 탐관오리와 타협하지 않으며 빛을 발했다. 노론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정약용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곡산에서 일어난 민란을 저지하는 데 보낼 것을 정조에게 청한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곡산 도호부사 정약용은 ‘이계심의 난’이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의 억울함으로 벌어진 일이란 정황을 알게 됐다. 그는 상처 난 민심에 죄를 묻는 대신 부패한 토호와 아전들을 벌했다. 정의가 회복되자 민심 또한 회복됐다.

정약용은 정조가 승하했을 무렵 한층 심해진 당파싸움을 견디다 못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이때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堂號)를 지었다. 여유당은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온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정치적으로 위태로워 겨울에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사방을 조심해야 했던 선생의 정치 인생을 보여준다.

정조가 죽고 머지않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이 시작된다. 김 관장은 “당시 신유사옥은 천주교뿐 아니라 남인을 잡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설명한다. 정약용은 부모의 제사를 모시지 못한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와 연루돼 오랜 귀양살이를 한다.

아전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다

정약용은 벼슬에서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유배지로 떠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더 깊게 학문을 팠고, 더 넓게 뜻을 펼쳤다. “하늘의 총애 입어 어리석은 마음속 열렸네. 육경(六經)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자찬묘지명 광중본에서 정약용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신 것은 임금의 은혜였지만, 귀양살이를 하며 경학 연구를 하고 학술을 펼 수 있던 것은 하늘의 덕’이라고 표현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한문학 최다 집필이라는 503권의 저서는 이 18년 유배생활에서 이루어졌다.

홀로 평생을 써도 못 쓸 방대한 분량의 저술은 제자들과 함께 썼기에 가능했다. 정약용은 애민정신에 걸맞게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제자들을 키웠다. 전라남도 강진에 처음 자리 잡고서는 그 동네 아전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청, 황산 등 다산의 초기 제자들은 사대부가 아닌 아전집안 출신이다. 외가쪽 한 친척이 강진 귤동 다산(茶山)에 갖고 있던 초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준 뒤로는 다산초당에서 양반 자제들과 백련사 스님들까지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이때부터 제자들과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했다.

저술 활동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선생의 마음이 깊이 배어 있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는 그러한 정약용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목민심서>는 당시 국가 제도와 가치 속에서 목민관이 가져야 할 덕목을 논했다. <경세유표>는 국가의 전면적 개혁을 논했다. 김 관장은 “정약용은 현실개선과 개혁적 이상을 함께 꿈꾼 실학자”라 말한다.

   
▲ 김시업 관장은 실학박물관에서 2시간쯤 실학 전반에 대해 강연한 뒤 다산의 무덤 앞에서 또 한 시간 가량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열강을 했다. © 하상윤

"<경세유표>는 국가 체제 자체를 바꾸자고 말하는 신국가건설론입니다. 이거만 꿈꾸면 이상주의 개혁론 밖에 안 돼요. 국가 제도를 바꾸는 건 시간이 걸립니다. 현실적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려 만든 매뉴얼이 <목민심서>예요. 다산은 현실적 계산과 대응을 고민하면서 이상주의적 미래를 함께 그렸어요.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생각하는 점이 다산에게서 배울 부분이에요."

현재 다산의 친필 저서 중 130권 정도는 ‘아사미 문고’란 이름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서 판사로 재직하며 고전자료를 수집한 아사미 린타로가 그 자료들을 일본 미쓰비시그룹에 매각했고 그것을 다시 버클리대학이 사들였기 때문이다.

부인이 보낸 치마에 적어 보낸 글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세상과 절연했지만, 가족과는 그럴 수 없었다. 홍씨 부인은 남편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간 지 10년째 되던 해에 자기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싸서 남편에게 보냈다. 이 치마를 ‘하피’(霞陂)라고 부르는데, ‘붉은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30년이 지나 색이 바랜 붉은 치마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보낸 것이다. 김 관장은 “귀향 간 남편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 있으니 영결을 고한 것”이라 해석했다.

다산이 그 치마를 오려 두 아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쓰고 책자를 만든 게 하피첩이다.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한평생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 하피첩은 비록 폐족(廢族)을 당했지만, 선비로서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잃지 말라고 가르치는 아비의 마음을 담았다. 정약용은 남은 치마 한 조각에 매화 나무 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는 매조도(梅鳥圖)를 그려 시집가는 딸에게 보냈다. 딸의 결혼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림 위에 평안한 가정을 이루라는 의미의 시를 써서 부정(父情)을 담았다.

   
▲ 하피첩을 만드는 정약용의 모형이 실학박물관에 전시돼있다. © 하상윤

하피첩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 정약용의 후손들이 지니고 있다가 1950년 전쟁 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006년 수원에서 폐지를 줍는 한 할머니의 수레에서 발견돼 KBS <진품명품>에 하피첩이 등장했다. 이를 서울대 사학과를 나온 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장이 사들였으나, 2011년 은행이 파산하면서 압류됐다. 지난 9월 경매에 부쳐졌는데,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5천만원에 사들여 내년 2월쯤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게 정치

노론한테 탄압받던 정약용의 삶은 나라가 망할 위기에 와서야 재조명됐다. <순종실록>에 따르면 1910년에야 정약용은 ‘문도공(文度公)’라는 시호를 받아 죄인 신분에서 복권(復權)됐다. 그러나 바로 나흘 뒤,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돼 나라를 잃는다. 시호를 내린 일도 1906년부터 조선을 관리감독하고 있던 일제 통감부 아래서 진행된 것이었다. 김 관장은 “일제의 회유 작전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다산유적지를 조성한 것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 때였다. 정일권 국회의장은 여러 명이던 소유주를 정리해 여유당을 복원하고, 넓은 기와집을 실학박물관으로 꾸며 다산유적지를 조성했다. 그러나 1974년 경기도지사가 이를 기려 놓은 비석에는 정 전 국회의장의 이름 석 자가 하얗게 쪼아져 있다. 민주화 운동 시기에 청년들이 그의 이름을 쪼아 없애고, 경기도지사는 다시 글씨를 새기고, 청년들은 다시 쪼아버린 흔적이다. 한평생 백성을 위하고 민생을 살리려 노력해온 선생의 삶이 국민을 탄압한 군사정권에서 조명받은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 다산유적지 완공을 기리는 비석에 정일권 전 국회의장의 이름 석 자가 하얗게 쪼아져 있다. © 김영주

"저는 다산을 애민(愛民)주의가 아니라 위민(爲民)주의라 말해요. 애민은 지배자가 위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위민은 이웃과 더불어 생산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다산의 철학은 인본주의가 바탕이 되거든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인간다움이 바탕이 돼야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지식을 쓰게 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란 말이 있죠. 지식이 힘이 되려면 인본주의와 함께 가야 합니다."

김 관장은 “오늘날에는 지식이 자본과 결탁해 소수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면서 정약용의 위민주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의 사상은 당대에는 정쟁 때문에 외면받았고, 후대에는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정약용의 위민사상을 진정으로 본받은 정치인을 가까운 시일에 만날 수 있을까?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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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vieve (188.XXX.XXX.27)
2016-05-13 05: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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