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용산 화상경마장 반대 시위 정방 공동대표

"처음엔 반짝반짝 불도 들어와서 예쁜 건물이라고만 생각했지, 경마장인 줄 몰랐어요. 다 지어지고 나서 알았죠. 학교 앞에 도박장이 말이 되나요?”

지난해 6월부터 9월까지 임시 개장했다 문을 닫았던 서울 한강로3가 용산장외마권발매소(화상경마장)가 지난달 31일 정식 개장했다. 화상경마장은 실제 경주가 이루어지는 야외경마장보다 도박중독자 비율이 더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건물의 반경 500미터(m) 안에 유치원과 초중고 등 6개 교육시설이 몰려 있어 주민들의 반대가 격렬하다. 지난해 1월부터 경마장 건물 옆에 농성장을 차리고 반대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용산화상경마도박장 추방대책위원회의 정방(45) 공동대표를 지난달 21일과 지난 14일 두 차례 만났다.

▲ 5월 21일,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용산화상경마장 추방대책위 정방 공동대표. ⓒ 서혜미

중독자 들끓는 사행시설, 두 아이 엄마로서 두고 볼 수 없어

인근 성심여고에 다니는 딸과 선린중에 다니는 아들을 두고 있는 정 대표는 화상경마장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지난 2013년 4월 말 처음 알았다고 한다. 지하 7층, 지상 18층(총면적 1만 8,212㎡) 짜리 건물이 2012년 말 완공된 후, 용산구의회 의원 두 명이 성심여중고로 찾아왔다. 용산역 부근 화상경마장이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경마장 이전 반대에 나설 주민들을 수소문하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경마장 건물은 학생들이 등하교할 때 이용하는 버스정류장 5개와 약 160m 거리예요. 학생들이 자주 찾는 전자랜드에 갈 때도 경마장 앞을 지나가야 합니다. 아이들 교육과 주거환경에 해가 된다고 판단했죠.”

화상경마장에서 가까운 성심여중고 교문에 학교 측과 주민들이 ‘학교 앞 경마장 절대 반대’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해 5월 1일에는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구의원과 학부모, 주민 십여 명이 모였다. 당시 딸이 성심여중 2학년이었고, 영화포럼 등 학교행사 때문에 다른 주민, 교사들과 안면이 있었던 정 대표는 학부모로서 책임감을 느껴 공동대표를 맡았다고 한다.  

화상경마장을 운영하는 마사회는 주민들의 이런 움직임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강경한 반응을 보였다. 학교보건법은 학교 경계로부터 200m 이내에 유해 시설을 지을 수 없도록 하고 있는데, 경마장에 가장 근접한 학교인 성심여중고와의 거리가 약 230m라 위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농림축산식품부 규정에 따라 경마장을 이전할 때는 주민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마사회 측은 강조했다. 마사회는 농림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주민들은 마사회가 농림부에 화상경마장 이전 승인신청서를 낼 때 가장 가까운 학교와의 거리를 350m로 허위기재하는 등 잘못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똑 부러지는 불법행위를 잡아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주민들이 화상경마장 반대 농성에까지 돌입한 것은 도박장을 방치할 경우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경륜 중독자에게 살해된 경기도 하남 여고생 

"반대 운동을 시작하고 그해 9월에 경기도 하남에서 살인 사건이 났어요. 수능을 앞둔 여고생이 공부하고 집에 가다가 경륜하던 아저씨 칼에 찔린 거예요. 그때 저희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미리 막을 수 있는 걸 막지 않아서 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2014년 1월부터 겨울 농성에 돌입했어요." 

당시 보도에 따르면 경륜(자전거경주) 도박으로 빚을 진 40대 남성이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가던 여고생에게서 돈을 뺏으려다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범인이 자주 갔다는 서울 올림픽공원 경륜장과 범행현장은 약 4킬로미터(km), 자동차로 10분 남짓한 거리였다. 용산 농성장의 학부모들은 화상경마장에 도박중독자들이 본격적으로 드나들면 등하교길 아이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노숙 농성을 시작한 지 3개월 뒤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도 희생된 단원고생 또래를 키우는 학부모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 대표는 “미리 안전을 관리했다면, 필요한 조치를 잘 취했다면 그렇게 예쁜 애들을 우리가 잃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건은 정 대표뿐 아니라 주민들이 마음을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아이들을 잃고 뒤늦게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책임감 때문에 공동대표를 맡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정 대표에게는 하루하루가 만만치 않았다. 법학을 전공한 89학번이지만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한 일도 없고, 정당과 시민단체 활동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2000년 둘째 아이를 낳고는 직장도 그만두고 살림만 해 온 입장에서 함부로 나설 게 아니라 정당과 시민단체 등에 맡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마장 입점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주민도 아닌 사람들이 나선다’며 정당과 시민단체를 비난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카메라 앞에서 떨고, ‘문신’의 위협에도 떨었지만  

“지금도 생각나. 7월에 여기서(화상경마장 앞) 기자회견을 할 때, 준비한 종이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읽기만 했어요. 카메라가 있는데 고개를 들고 말을 못하겠는 거예요. 그 정도로 떨렸어요.” 

2년 전 처음 사람들 앞에 섰을 때 고개도 못 들었다는 정 대표지만 지금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지난달 31일 화상경마장 전면개장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에는 취재진과 주민 등 300여 명이 모였다. 

▲ 6월 6일, 개장한 화상경마장 앞에서 주민들이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 서혜미

마사회가 예고 없이 경마장을 기습 개장했던 작년 6월에는 주민들과 마사회 직원·경마장 이용객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일부 주민은 실신해 구급차에 실려 갔다. 정 대표는 “평생 들어야 할 욕을 그 날 하루 다 들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옷을 벗고 문신을 과시하는 경마장 이용객들이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무섭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경마장이) 문을 열면 아이들이 이 앞을 다니다가 저런 분들을 만날 거 아녜요. 우리가 욕을 들을지언정,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겠다고 그날 뼈저리게 느꼈죠.” 

몸싸움은 양측의 고소·고발로 이어졌다. 마사회는 올해 1월 업무방해 혐의로 주민을 고발했던 것을 전부 취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직원 한 명이 소를 취하하지 않아 주민 한 사람이 약식기소됐다. 이 주민은 벌금 약식 명령서를 받아 정식 재판을 청구한 상태다.

마사회와 자꾸 부딪치다 보니, 직원들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주민들도 있다. 정 대표도 “길을 다닐 때 사람들이 절 유심히 쳐다보면 마사회 직원 같기도 하다”며 감시를 의식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하루는 마사회 직원이 집 앞까지 와서 정 대표를 설득하려고 해, 돌려보낸 뒤 사측에 항의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가겠다” 

자녀들에게 미안할 때도 있다. 하루는 아들이 “엄마, 나는 경마장 생겨도 안 들어갈 건데 엄마는 너무 열심히 한다”고 투정을 부렸다. 새벽부터 종일 밖에 나와 있느라 아이들 식사도 제대로 못 챙겨준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화상경마장 반대 운동에 서울시와 국민권익위원회 등도 힘을 보탰지만 주민들의 주장이 관철될 전망은 밝지 않다. 서울시의회가 경마장 외곽이전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박원순 서울시장도 개장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1,200억원이나 들여 건물을 지었고, 합법적으로 허가를 받았다’는 마사회를 현실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권익위가 이전철회 권고를 했지만 실효성은 없다. 정 대표는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주민들은 지난해 1월 22일부터 경마장 건물 옆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 서혜미

용산 화상경마장을 계기로 마사회의 문제점을 짚는 보도가 늘어났다는 게 약간은 희망을 주고 있다. 공기업들이 화상경마·경륜·카지노 등 사행산업을 확산시켜도 좋은가 하는 문제 제기와, 이런 시설이 들어선 지역에 도박중독자와 범죄가 늘었다는 고발보도가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지난해 충북 충주와 청주에 추진하려던 화상경마장은 무산됐다. 지난 3월 울산 울주군도 화상경마장 설립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전 월평동 주민들은 화상경마장을 시 외곽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 대표는 “사람들이 우릴 보면서 ‘사행 산업이 정말 문제가 많지’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하게 된다면, 여기에 쓴 삼 년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이 일은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에 끝까지 할 거예요.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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