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정준희 중앙대 교수
주제 ② 미디어 계보학

정준희 교수는 두 번째 특강 주제 ‘미디어 계보학’을 통해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에 이르기까지 미디어의 어원과 철학, 그리고 변천사를 짚었다.

무당도 매체다

“여러분이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많이 봤던 리트머스 시험지 있죠? 그것도 매체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험지 색의 변화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드러내잖아요. 매체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죠.”

매체, 곧 미디어(media)는 ‘가운데’라는 뜻의 라틴어 ‘medium’에서 왔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감각적 인지론’에서 언급한 그리스어 ‘mexatu'(중간자)를 번역한 말이다. 매체는 인지 대상과 인지 주체 사이에 존재하면서 어떤 과정을 매개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간자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신문을 비롯해 신체, 목소리 등 고전적 의사소통 수단과 도구, 실험 등 과학 연구수단도 매체에 포함된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 등장하는 무당처럼 혼령과 인간을 매개하는 매체라 할 수 있다.

▲ 영화 <사랑과 영혼>의 영매 오다메(우피 골드버그 분)는 자신의 몸을 매개로 죽은 자와 산 자를 소통시킨다. ⓒ 영화 <사랑과 영혼> 장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감각적 인지론’에 등장한 이후 매체 개념의 철학은 계속 발전했다. 기본적인 매체는 그림∙숫자∙문자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중에서도 문자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문자가 말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다 하여 믿지 않았다. 이러한 플라톤의 문자 비판은 매체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자 성찰이었다.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표현이 있죠? 하지만 그 표현을 들었을 때 진짜 그 사람이 앵두와 똑같이 생긴 입술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도 전혀 다르게 생겼고요. 이처럼 모든 비유는 거짓말입니다.”

18세기 들어 매체 개념은 미학적인 것에서 언어적인 것으로 전환됐다. 철학자 니체는 언어를 매체의 도구성이 아닌 언어 자체의 매체성에 관심을 가졌다. 모든 언어는 순수한 은유에 불과하다. 비유와 은유로 나타낸 현실은 진짜 현실이 아니다.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것처럼 만드는 도구이다. 따라서 모든 언어는 본질을 덮어버리는 ‘속임수’다. 이렇듯 언어를 바탕으로 한 성찰은 매체의 개념을 확장하고, ‘매체성’에 대한 이해를 전진시켰다.

▲ 정준희 교수는 미디어 계보학을 주제로 미디어의 어원과 철학, 그리고 변천사를 설명했다. ⓒ 배상철

매체는 원인이자 결과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얘기합니다. 이 궤변은 도대체 뭘까요? 춘향전을 영화로 볼 때와 연극으로 볼 때 전혀 다른 메시지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결과지만 우리의 의지나 사고를 형성하고 글이나 컨텐츠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원인이기도 하다. 미디움 이론은 우리가 컨텐츠에서 주목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콘텐츠에 영향을 미치는 형식적 요소들에 관심을 두자고 얘기한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은 같은 콘텐츠라고 하더라도 매체가 다르면 전혀 다른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래비티>를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봤을 때와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볼 때 경험은 굉장히 다르다. 우선 광활한 우주에서 느끼는 고립감이 느껴지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우리가 별도 요소라고 생각한 형식이 메시지와 결합해서 또 다른 종류의 메시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결국 매체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 물리적 특성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뉴미디어가 생겨나는 과정

“<스타워즈>에 제다이가 나오죠. 루카스 감독이 7인의 사무라이를 만든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오마쥬(존경의 표시)한 캐릭터입니다. 제다이가 입은 외투와 그들의 무기 광선검은 각각 사무라이 복장과 일본 검을 따온 것이에요. 오마쥬는 보이는 재매개의 가장 발달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매개(Remediation)는 한 매체가 다른 매체를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 이를테면 우리가 보는 매체 안에 다른 매체의 흔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매체는 기술적인 매체뿐 아니라 콘텐츠도 포함한다. 원본 매체에 대한 참조나 언급이 있는지의 여부와 사용자의 원본 매체 인지 여부에 따라 완전한 재매개(complete remediation)와 보이는 재매개(visible remediation)로 나뉜다. 보이는 재매개와 완전한 재매개 사이에 단순 재현, 개선, 재목적화, 흡수의 단계가 있다.

▲ 다양한 매체의 기능이 모여 새로운 매체가 된 스마트폰은 완전한 재매개에 가까운 매체다. ⓒ Flickr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완전한 재매개에 가까운 재목적화(repurposing) 매체다. 스마트폰은 웹 브라우저, 키보드, 화면, MP3 플레이어 등의 기능을 모아놓은 것이지만, 사용자는 하나의 기기(스마트폰)로 느낀다. 이는 다양한 매체가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흡수가 잘됐기 때문이다.

반면, 인터넷 신문은 단순 재현 정도에 그친다. 사용자가 온라인 신문을 보면서 종이 신문을 웹으로 그대로 옮겼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가끔 관련 동영상이나 관련 기사 링크를 걸어줌으로써 개선의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이렇게 매체 형식들은 기존 매체(올드미디어)의 형식을 흡수해 새로운 매체(뉴미디어)가 등장하거나 개선 혹은 재목적화를 반복하며 기존 매체의 변화를 가져온다.

슬로모션을 보고 왜 ‘리얼하다’고 느낄까?

재매개는 매개가 가지고 있는 논리에 따라 비매개(immediation)와 하이퍼매개(hypermediation)로 나뉜다.

“안경이 ‘나 안경이에요’라는 것을 드러낸다면 어떨까요? 아마 안경 낀 사람들은 너무 불편하겠죠. 안경은 그저 잘 보이는 역할을 해야지,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안경은 비매개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글라스는 어떤가요? 패션 소품이니까 자신의 존재를 강조해야 합니다. 안경과 달리 하이퍼매개에 가깝죠.”

비매개는 매체가 개입하지 않은 느낌, 즉 투명성을 추구한다. 안경을 낀 상태에서 안경을 찾는 현상을 전형적인 비매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모방은 최대한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해서 자연주의적 지향(naturalism)이라고도 말한다. 매체가 매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매개된 현실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적 매체가 이 논리를 지향했다. 안경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매개는 이것 역시 매체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지난 세월호 참사 때 JTBC 손석희 앵커가 직접 팽목항에 가서 비바람을 맞으며 보도했죠. 굳이 왜 그랬을까요? 현장 가서 직접 비 맞아야 더 잘 알 수 있나요? 정보를 더 얻으려고 가는 게 아니라 ‘우린 이 현장을 직관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시청자에게 주려고 간 것이죠. 사용자에게 매체에 대한 신뢰를 주기 위해서. 이것이 비매개의 효과입니다.”

뉴스는 가장 대표적인 비매개 매체다. 기자와 앵커 모두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우리한테 직접 얘기하듯이 한다.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뉴스는 시청자에게 신뢰를 줘야 하고 신뢰를 형성하는 데 눈을 맞추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보도하고 ‘현실에 가까이 있다’라는 사실감을 부여하려고 JTBC 손석희 앵커처럼 많은 노력을 한다.

▲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JTBC의 손석희 앵커는 직접 팽목항에서 뉴스를 보도했다. ⓒ JTBC 뉴스 화면 갈무리

시각적 매체가 아닌 라디오는 눈을 맞추는 대신 친숙한 대화체를 쓰며 신뢰를 형성한다. 눈을 맞추고 대화체를 쓰며 수용자가 되도록 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잘 숨길수록 좋은 매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비매개는 매개를 하는 매체의 흔적을 지우고 수용자의 현실을 직접 만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비오는 날 격투 장면이 유명하죠. 상대방을 때리는 데 주먹이 천천히 날아갑니다. 슬로우모션이라는 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인데요. 비현실적인 그 장면을 보고 관객들은 ‘우와 리얼한데’라고 느끼는 이유는 뭘까요?”

자신을 숨기려는 매체와 반대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매체의 매개 방식을 하이퍼매개라고 한다. 영화에서 주먹질 장면을 길게 늘임으로써 관객으로부터 깊은 몰입감과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현실의 특정 부분을 과장하고 왜곡하면 더 큰 현실감이 느껴지는 착각을 하고, 이는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이퍼매개가 추구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 비자연적 요소를 강조하고 보여줌으로써 수용자가 재미를 느끼게 한다.

하이퍼매개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자연주의가 아닌 내용보다 형식을 우위에 두는 형식주의(formalism)에 가깝다. ‘현실을 모방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미술계에서 인상파의 작품이 하이퍼매개에 속한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실제 해바라기와 닮지 않았다. 강한 붓터치를 이용해 해바라기 정보의 일부만을 특정해서 과장되게 표현했다. 하지만 우리는 왜곡된 해바라기를 보고 진짜 해바라기 같은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슬로우모션이나 붓터치 등의 매체 기술을 강조하고, 수용자는 현실에 있다는 느낌 대신 현실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종이신문은 변화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미디어는 없다. 뉴미디어는 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미디어끼리 지속적으로 서로에 대해 언급하고 참조하고 재생산하고 대체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뿌리는 연극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연극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영화는 연극과 다른 종류의 새로운 매체라고 느껴진다.

헝가리 미술사학자 아놀드 하우저는 자연주의(비매개)와 형식주의(하이퍼매개)가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이는 기존 미디어를 단순 반복하며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고 개혁하려고 시도하는 방향으로 반복한다. 실제로 미디어는 계속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치면서 변화를 낳는다. 완전한 뉴미디어가 존재하지 않듯이 올드미디어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 대표적 올드미디어인 종이신문은 지난 수십년간 다른 방송매체보다 훨씬 빨리 변화하고 있다. ⓒ Flickr

종이신문은 대표적인 올드미디어지만 지난 수십년간 이뤄온 변화는 엄청나다. 방송매체보다 더 많이 빨리 변화하고 있다. 기존 매체는 새로운 매체로부터 끊임없이 존재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뉴미디어의 위협 때문에 변화하는 올드미디어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다. 종이신문을 쉽게 포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 교수는 “올드미디어에서 활동을 하게 될 여러분은 현재 지형에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과제”라며 강의를 마쳤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홍세화 정준희 정혜윤 이성규 한홍구 이창식 이주헌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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