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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관객 모은 '변호인'의 비밀
[씨네토크] 제작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영웅 서사’
2014년 12월 02일 (화) 18:37:52 정성수 기자 un2ru2re2@naver.com

점심 시간에 뭐를 먹을까 결정하는 문제만큼 어려운 것이 영화 고르기다. 영화소개 프로그램, 포털 평점, 지인 추천 등 다양한 경로로 사전정보를 얻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실망하는 때가 많다. 헐리우드식 화려함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화 스토리가 시원찮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소년 시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북미대륙 원주민 신화와 아더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신화학자가 된 캠벨은 세계 전역의 신화를 조사했다. 이 조사로 그가 밝혀낸 것은 전 세계 신화에 공통된 ‘영웅서사구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캠벨의 ‘영웅서사구조’는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등 헐리우드 거장 감독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영웅서사구조’를 차용한 영화들은 하나같이 전례없는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영웅서사구조가 뭔지만 안다면 이제 영화 고르는 문제는 점심 메뉴 고르는 문제보다 쉬워진다.

   
▲ '영웅서사구조’를 따르는 반지의 제왕, 아바타, 포레스트 검프, 슈렉(왼쪽부터). ⓒ <반지의 제왕> <아바타> <포레스트 검프> <슈렉> 영화 포스터

<반지의 제왕>, <아바타>, <스타워즈>,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인디애나 존스>, <포레스트 검프>, <슈렉> 같은 영화들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면 ‘영웅서사구조’를 이해하기 쉽다. 감독도 배우도 다른 이 영화들이 캠벨의 ‘영웅서사구조’를 따른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캠벨의 의하면, 신화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힘을 획득하는 ‘재생의 삶’을 가르쳐 준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은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살아갈 가치를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는 존재다. 즉 캠벨의 영웅서사구조는 ‘영웅’으로 표상된,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의 여정’을 도식화한 것이다.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떠난 프로도 배긴스가 동료 샘의 도움을 받고 처음 느꼈던 두려움을 이겨내고 불의 산에 올라가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캠벨에게서 영감을 받은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캠벨의 ‘영웅서사구조’ 17단계를 12단계로 압축해 헐리우드 영화 스토리텔링으로 실용화시켰다. 출발(일상 세계-모험에의 소명-소명의 거부-조력자와의 만남-첫 관문 통과), 입문(시험, 적대자-심연에의 접근-시련-보상), 귀환(귀환의 길-부활-영약, 자유의 삶)이 그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만여 편이 넘는 스크린플레이를 평가했다.

항상 양식만 먹을 수는 없다.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뿐만 아니라 국내영화도 본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변호인>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했던 사건을 토대로 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하는 일부 사람들이 한 포털에서 영화평점을 고의로 낮게 주는 ‘영화평점테러’를 했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며 흥행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됐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영화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논란과 입소문에 힘입어 <변호인>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변호인은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매트릭스, 터미네이터를 모두 꺾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언제부턴가 배급사와 영화사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흥행 성공에 중요한 요소지만 천만 관객을 모으려면 일단 영화가 재미있어야 한다. 변호인의 성공에는 영웅서사구조 스토리텔링이 숨어있다. 세무변호사로 살아가던 송우석은(일상세계) 선배로부터 국가보안법 사건을 부탁받는다.(모험에의 소명) 우석은 세무변호사인 자신보다 다른 변호사를 찾아보는 게 좋겠다며 선배의 부탁을 거절한다.(소명의 거부) 그러나 우석은 은인인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인 진우가 국보법사건의 피의자임을 알게 되고 이번 사건을 변호하기로 결심한다.(모험에의 출발) 프로도가 모험을 결심했듯 우석의 모험도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국보법 사건은 유무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형량을 정하는 재판이었다. 판사와 검사는 피의자들을 이미 ‘빨갱이’로 정해놓고 재판을 시작한다. 경찰은 비밀스럽게 피의자들을 고문했고 증거 또한 남기지 않아 우석은 변호에 어려움을 겪는다. 고문 현장을 어렵게 찾아냈지만 고문경찰 차동영에게 맞고 협박까지 당한다. 학생들이 읽은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 Carr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회신을 준 영국대사관, 고문을 목격해 결정적 증인이 될 수 있는 군의관, 외신기자들을 불러준 친구가 조력자로 등장한다. 이들의 도움으로 우석은 공권력에 의해 조작된 부림 사건의 진실을 찾는 데 가까워진다. 수많은 시련과 적대자를 조력자의 도움으로 극복해가면서 심연으로 접근하는 단계다.

   
▲ 세무변호사 우석(좌), 민권변호사 우석(우). ⓒ 영화<변호인> 갈무리

그러나 휴가 중인 군의관의 상태가 당국에 의해 탈영으로 바뀌어 버리면서 결국 국보법 사건은 유죄판결로 끝이 난다. 최선을 다해 변호한 우석에게 아주머니는 국밥을 말아주며 위로한다. 영화의 화면은 어두워진다. 다시 밝아지면서 도로 위에서 확성기를 든 우석이 보인다. 우석의 뒤로는 시위대가 있고, 앞에는 무장경찰이 달려오고 있다. 이 장면이 영웅서사구조 단계 중 죽음(평소의 주인공)/부활(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인 주인공)에 해당한다. 세무변호사 우석의 죽음과 민권변호사 우석의 탄생이다.

영화가 영웅서사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웅서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다. 영웅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우리 자신이 겪는 시련, 도전과 성숙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석과 프로도는 우리의 삶에서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우리의 다른 모습이다. 영웅서사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보는 영화에, TV프로그램에, 소설에도 존재한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문제는 여전히 어렵지만 재미있는 영화, TV프로그램을 고르거나 심지어 제작하는 문제는 간단해졌다. 여섯 글자만 기억하자. 영웅서사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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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기자]
단비뉴스 미디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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