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국가론] 김다솜 기자

입주민들의 폭언에 못 이겨 아파트 경비원이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경비원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감시, 단속 직종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주 40시간인 법정근로시간의 적용도 받지 못할뿐더러 최저임금, 연장근로수당 등도 해당되지 않는다. 부당한 노동을 막아줘야 할 고용노동부가 오히려 불법 노동을 방관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짓밟은 꼴이다. 국가는 자본에게 굴종한 치부를 감추기 위해 노동자를 외면했다. 외면은 폭력의 다른 말이다. 인권과 노동 기본권이 무시당하는 곳, 바로 ‘소격동’이다.
독거노인들의 집도 ‘소격동’이다. 외롭게 지내는 독거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홀로 죽는 것이다. 주민센터에서 무료로 넣어주는 요쿠르트가 이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장치다. 요쿠르트가 며칠 간 쌓여 있을 때야 노인에게 말을 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지만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국가는 이들을 외면했다. 노인들은 지금도 외로움과 병마, 굶주림과 싸우다 홀로 죽어가고 있고 몇 달이 지나 발견되기도 한다. 무연사회, 무연사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소격동’은 아주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새롭게 부각된 ‘소격동’은 광화문 광장이다.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세월호 유가족 집회 금지법’이라 불리는 집시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유가족들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어겼다며 폴리스 라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특정 기관 청사 또는 저택의 경계로부터 100m 인근에서는 모든 집회를 금한 것이다. 광화문이란 이름의 ‘소격동’에서는 집회의 자유가 무시당한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 달라는 이들의 목소리에 국가는 세월호 피로감만 외친다. 국가의 방관으로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지만, 유가족이 기대한 국가의 보호는 없고 탄압만이 있을 뿐이다.
‘소격동’은 장소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사이버 공간까지 침범했다. 검찰은 국가안보란 명분을 내걸고 온라인 상시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국내 인터넷 서비스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사실상의 민간인 사찰이다. 국가가 국민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는커녕 집단 통치를 위한 감시를 노골화하고 있다. 안보가 중요하더라도 국민을 감시하는 일은 국가의 안위가 심각하게 위협당하는 경우에 한하여 아주 협소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학원녹화사업이 저질러진 뒤 30년이 지났다. 잔혹한 일이 벌어졌던 원래의 ‘소격동’은 ‘걷고 싶은 거리’가 되었고 자유롭게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그럼에도 상징의 ‘소격동’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은 오히려 다양해졌고 ‘소격동’은 빅브라더처럼 거대해졌다. 대한민국 안의 모든 ‘소격동’을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소격동’이 우리 곁에 여전히 펄펄 날뛰고 있음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지금 우리 바로 곁 ‘소격동’에서 행해지는 폭압의 정치를 알지 못한다면 ‘소격동’을 무너뜨릴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소격동’의 존재를 공유하고, 그 안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 중 하나가 '국가는 무엇인가'다.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워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공화정 이래 권력의 상징인 국가의 역할과 의무, 개인인 국민의 자연권과 행복추구권 사이의 관계는 치열한 논쟁과 싸움을 통해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에 이르렀다. 21세기인 오늘 다시 묻는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가. 대한민국은 어디있는가. <단비뉴스>는 앞으로 5차례 걸쳐 '단비국가론'을 싣는다.(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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