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중국 ‘로맨틱 여성 아티스트’의 불꽃같은 삶

<생사의 마당>, <후란강 이야기>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성작가 샤오홍(蕭紅)이 영화 <황금시대>를 타고 한국을 찾았다. 지난 16일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초청작으로 상영된 이 작품은 김태용 감독과 결혼한 중국배우 탕웨이가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 때문에 먼저 눈길을 끌었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곧 샤오홍의 ‘불꽃같은 삶’에 매료됐다.

지난해 샤오홍 탄생 100주기를 맞아 중국에서는 이미 후오지엔치 감독이 영화 <샤오홍>을 선보였다. 그런데 허안화 감독이 다시 한 번 <황금시대>로 샤오홍을 불러낸 것이다. <뷰티풀 2012>(2012), <심플 라이프>(2011) 등을 만든 허 감독은 “샤오홍은 탁월한 ‘로맨틱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은 후 샤오홍에 완벽히 매료됐다”고 영화를 또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 영화 <황금시대>의 포스터 ⓒ 영화 <황금시대> 공식사이트

사랑의 도피 등 파란만장한 삶을 작품으로

1911년에 태어나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샤오홍은 동시대 중국의 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은 10년 동안 100편의 작품을 낼 만큼 ‘글’에 목숨을 걸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 <황금시대>는 글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함께 그녀를 만든 세 명의 남자를 주목한다.

첫 번째 남자는 샤오홍의 약혼자다. 약혼자는 하얼빈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남자였는데, 어린 샤오홍은 집안에서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 유부남과 함께 가출한다. 하지만 유부남은 떠나고 샤오홍은 낯선 땅에서 무일푼으로 고생하게 된다. 가족, 형제들과도 인연을 끊은 채 어렵게 살아가던 샤오홍에게 어느 날 약혼자가 찾아왔다. 힘든 생활에 지쳤던 샤오홍은 그토록 싫어했던 약혼자에게 마음을 주게 됐고, 아이까지 갖게 된다.

▲ <황금시대>에서의 샤오홍의 모습. 1930년대 샤오홍의 복식과 헤어스타일을 잘 살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영화 <황금시대> 공식사이트

그런데 여관비가 몇 달치 밀린 상태에서 약혼자는 임신한 샤오홍을 남겨두고 아무런 설명 없이 종적을 감춘다. 집안의 냉대와 둘이서 살기엔 버거운 현실이 그를 도망치게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만삭의 샤오홍은 빚을 갚지 못해 여관에 갇히게 된다. 그 절박한 순간에 샤오홍은 한 신문사에 자신의 사연이 담긴 절절한 글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신문사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난 샤오홍은 아이를 낳지만, 도저히 기를 수 없는 형편이라 바로 입양을 보낸다. 그리곤 어두운 여관방에서 자신의 유일한 꿈인 ‘글’을 붙잡는다. 한 번 안아보면 정이라도 들까 두려워하며 아이를 보내야 했던 그녀의 경험은 소설 <버린 아이>로 다시 태어난다.

'자유롭게 글쓰는 삶'이 그녀의 황금시대

이 시점에 등장하는 사람이 샤오홍의 ‘운명의 남자’라 불리는 샤오쥔(풍소봉 분)이다. 샤오홍이 가장 사랑했고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남자다. 그는 샤오홍이 편지를 보낸 신문사의 칼럼니스트였는데, 작가이기도 했던 그의 눈은 샤오홍의 재능을 단박에 포착했다. 샤오홍은 샤오쥔의 격려를 받으며 글을 쓴다. 영화 속에서 “만약, 내가, 당신만큼 재능이 없다면?”하고 샤오쥔에게 묻는 그녀의 모습은 샤오쥔의 사랑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써야한다는 불안감을 드러냈다.

신문사에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한다고 해도 가진 게 없기는 마찬가지. 두 사람은 허름한 여관을 전전하고 싸구려 국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추운 날씨에 자신은 다 해진 스웨터 하나만 입고도 샤오홍을 위해 기꺼이 외투를 벗어주는 모습, 신발끈이 끊어진 샤오홍에게 자신의 신발끈을 내주는 샤오쥔의 손길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그려냈다.

▲ 샤오쥔과 샤오홍이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행복했던 때.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서로 나눠 마시고 있다. ⓒ 영화 <황금시대> 공식사이트

이들의 사랑이 위기를 맞는 건 중국의 대문호 루쉰을 만나면서 부터다. 샤오쥔은 알고 지내던 루쉰에게 샤오홍을 소개한다. 루쉰은 “샤오쥔보다 샤오홍의 창작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동료 작가들도 샤오홍의 작품을 더 주목한다. 자격지심을 느낀 샤오쥔은 그 때부터 밖으로 돌며 그녀를 외롭게 만든다. 그래도 글을 쓰며 샤오쥔을 기다리던 샤오홍은 실망 끝에 루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오로지 글을 쓰는 데만 전념한다. 이 때 샤오쥔에게 쓴 편지 속 글귀가 인상 깊다.

“자유롭게 글을 쓰는 삶…이것이 나의 황금시대다.”

샤오홍은 샤오쥔의 사랑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쓰는 것보다 자유롭게 글을 쓰는 삶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만, 곧 영원한 이별을 맞는다. 샤오쥔은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 입대했고, 샤오홍은 글과 함께 남았다.

샤오쥔과 헤어졌지만 그녀의 뱃속에는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 때 루쉰과 교류하며 알게 됐던 동료 작가 두완무가 그녀의 곁을 지켜준다. 둘은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영화에는 샤오홍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두완무의 순애보가 부각됐지만 샤오홍의 사랑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쨌든 샤오홍은 두완무의 도움으로 계속 글에 몰입할 수 있었다.

결말은 비극적이다. 샤오홍과 샤오쥔의 아이는 세상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숨진다. 샤오홍도 갑작스럽게 폐결핵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31년의 짧은 생이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목숨보다 글이 소중하다”며 계속 쓰려고 했던 모습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세 명의 남자에게 의지했지만, 남자에게 목을 매기 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에 자신을 맡겼던 여자. 중국 근현대사 중 가장 격변기로 꼽히는 1930년대에 활동하면서도 민족주의 대신 순수 문학을 추구했던 로맨티스트. 샤오홍은 풍파 많았던 자신의 삶을 글로 녹여냄으로써 당대와 후세 민중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었다.

▲ 극 중 샤오홍이 죽기 직전 기력이 다한 모습이다. 탕웨이가 뽑았던 명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영화 <황금시대> 공식사이트

극적 긴장감 없이 긴 러닝타임은 부담

허안화 감독은 샤오홍의 이야기를 독특한 기법으로 영상에 펼쳐냈다. 샤오홍을 둘러싼 주변 인물의 인터뷰 장면이 들어가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변 인물이 샤오홍의 삶에 대해 추측하면서, 관객들도 장면을 재해석할 여지를 주었다. 다만 중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선 샤오홍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관객의 영화 이해도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지나치게 상영시간이 길었던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무려 178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느낄 만큼 극적인 장면이 별로 없었다. 조용히 집중하면서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들 여지는 있었지만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색계>와 <만추> 등을 통해 독특한 매력을 보여 준 탕웨이가 ‘불꽃같은 여성 작가’를 연기한다는 점만으로도 한국 관객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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