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국제음악영화제] 마초 아빠와 게이 아들의 성장기, 영화 '춤추고 싶어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 촌스러운 금테안경까지 둘은 누가 봐도 부자 사이다. 그러나 두 남자는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이 무색하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들 플로리는 또래의 남자애들과 달리 스포츠나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피아노를 치거나 엄마와 함께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일이 좋다.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부터 찾는 전형적인 마마보이이며 여자보다는 남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자다. 반면 다이빙 코치인 아빠 하노는 직업상 명령하는 게 몸에 밴 사람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머리 손질부터 음식을 차려 먹는 일까지 제 손으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는 게 전부다. 마초 그 자체인 캐릭터다.

두 남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빠 하노는 엄마랑 이상한 옷을 입고 춤추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유별난 아들 때문에 부부 사이도 멀어지는 것 같아 하노에게 아들 플로리는 눈엣가시다. 플로리도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남자다움만을 강요하는 아빠가 싫은 건 매한가지다. 그나마 이 둘의 관계가 유지되는 건 엄마의 존재 덕분이다. 아들에게는 위로를, 아빠는 설득해가며 두 남자를 서로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나 두 남자의 균형추인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진 후 두 남자는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 놓인다.

▲ 아들 플로리(왼쪽)가 엄마(오른쪽)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복장을 입고 춤추는 장면. ⓒ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1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시네 심포니> 부문에 초청된 영화 <춤추고 싶어요(I Feel Like Disco)>에 나오는 한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다.

엄마와 아내를 잃어버린 두 남자

부자간일수록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영화 속 아빠 하노와 아들 플로리는  ‘엄마’라는 창구를 통해서 소통을 해왔다. 둘이 직접 속을 터놓고 그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 본 경험이 없다. 자연스레 엄마의 자리가 공백이 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시험대에 오른다. 

플로리는 엄마가 죽은 것과 진배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매일 병실을 찾아 엄마 곁에서 예전처럼 좋아하는 가수의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까지 한다. 엄마가 다시 깨어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 옆에 있어야 할 아빠는 도통 병실을 찾지 않는다. 플로리는 아빠란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빠 하노는 아내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으며 호흡기를 뗄지를 조만간 선택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매일 병실에서만 사는 플로리를 더는 저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노는 아들을 바꾸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자극 효과’라는 미명하에 다짜고짜 아들을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게 하기도 한다. 아들과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아빠의 노력이 한 번에 통할 리가 없다. 플로리는 하노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만다. 오히려 플로리는 다이빙장에서 만난 아빠의 남자 제자 라두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노와 플로리의 관계는 어긋날 대로 어긋난다.

그래도 하노는 ‘아빠’였다. 아빠이기에 계속해서 플로리에게 먼저 다가선다. 물론 아들이 좋아하는 라두를 불러 불편한 식사자리를 만들고, 안전한 성교육이라며 콘돔을 건네는 등의 어이없는 실수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라두와 플로리가 키스를 하게 만드는 등의 뜻밖의 상황을 연출한다. 플로리는 여전히 아빠 하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예전보다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 아빠 하노(오른쪽)가 아들 플로리(왼쪽)가 좋아하는 라두(가운데)를 초대해 식사하는 장면. ⓒ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아빠와 아들은 서로 의지하게 된다. 라두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플로리 엄마의 병실에 데려와 대놓고 키스를 한다. 플로리는 버티기 힘들었지만, 엄마는 자신에게 더는 위로를 건넬 수 없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소파에 앉아 축구를 보고 있는 아빠 하노 뿐이다. 결국 플로리는 아빠의 가슴에 안겨서 운다. 하노는 그런 아들에게 왜 우는지 묻지 않고 다만 조용히 머리를 감싸 안아 줄 뿐이다. 엄마의 호흡기를 떼던 날, 아빠 하노는 소리 내 펑펑 운다. 여태까지 하노가 보여줬던 마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한 여자를 사랑했던 한 사내의 모습만이 존재했다. 그런 아빠 하노를 조용히 안아준 건 아들 플로리였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법을 깨우쳤다.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하노와 플로리처럼 부자간일지라도 말이다. 마초 아빠 하노와 게이 아들인 플로리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처럼 서로 위로는 할 수 있다. ‘위로(慰勞)’에 ‘로(勞)’ 자는 한 마디로 애쓴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위해 애쓴다는 것만큼 따뜻한 행동이 어디 있을까. 하노와 플로리의 차가웠던 관계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엄마의 죽음도 서로에게 건넨 ‘위로’가 있었기에 끝내 극복 가능했다. 영화 <춤추고 싶었다>는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