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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이 이런 땅일 줄이야!
[지역∙농업보도실습] 의병의 고장을 둘러보다
2013년 12월 02일 (월) 09:37:40 박일규 이슬비 기자 sputternik@naver.com

“한국은 모든 가치를 중앙에서 독점해왔기 때문에 지역의 관점에서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이 없어요. 지역에서 발행되는 책자만 봐도 중앙에서 내려온 가치를 섬기는 걸 최고로 여겨요.”

세명대학교 교양학부 구완회 교수는 외면받는 지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구 교수의 지적처럼 제천에 있는 세명대의 저널리즘스쿨 학생들도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이 얼마나 유서 깊고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인지 모른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그저 시멘트 공장이 많은 지역, 좀 더 관심이 있어봤자 음악영화제가 열리는 곳 정도로 안다.

가까이 있지만 알지 못했던 역사

예로부터 제천은 교통의 중심지였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전투가 벌어진 전략요충지였고 조선시대에는 남부지방의 물자를 서울로 실어 나르던 곳이었다.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잉태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통일신라 시절 당나라에서 징허의 가르침을 받고 선종을 전파하던 원랑선사의 부도탑비가 제천에 있었는데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에는 산림의 본거지였다. 정계에서 밀려난 선비들이 충청지역에 자리를 잡고 재기를 노렸다. 그 중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수양에만 힘쓰던 선비들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 후기 가장 심오한 철학 논쟁인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주역이 됐다.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는 숙종 때 좌의정에 제수됐는데도 사양한 대표적 산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만동묘와 스승을 제향하기 위한 화양동서원을 세웠다.

“금강산은 산이 아름답고, 한강은 강이 아름다운데, 네 고을(조선시대 제천은 현, 청풍은 도호부, 단양은 군, 영춘은 현)은 산과 강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어요.”

   
▲ 제천에서 활동한 예술가 옥소 권섭(1671~175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름다운 산수가 빼어난 예술인을 낳는다고 했던가? 권상하의 조카 권섭은 제천에서 활동한 대표적 문인이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을 유람하며 한평생을 살았다. 그는 빼어난 시를 많이 남겼는데, 대부분 문인들과 달리 ‘뼈가 많아 먹기 어려운 생선’과 ‘씁쓸한 웃음’ 등 일상생활을 주제로 소박한 시도 꽤 썼다. 자신이 꾼 꿈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한 화가이기도 했다. 지금도 제천에는 권섭의 호를 딴 ‘옥소 예술제’가 열린다.

조선 말기 제천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봉양의 배론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조정의 탄압을 받았지만 개항 후에는 ‘양대인’(洋大人)을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동학 접주 성두환도 제천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다.

나라가 혼란스럽던 1889년에는 남한강 지류 주포천이 흘러드는 작은 마을 장담에 한 선비가 정착했다. 춘천에서 떠나온 학자 유중교였다. 그는 일찍이 화서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고 학문적 명성을 쌓았다.

유중교는 장담서사(長潭書社)를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이들은 열흘에 한 번 모여 공부하고 토론했다. 장담강록(長潭講錄)에는 참여한 선비 이름, 읽은 책 등이 자세히 적혀있다. 유중교는 제천에 자리 잡은 뒤 4년 만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제자들은 훗날 항일의병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제천의병의 중심이 된다.

왜 선비들이 무기를 들었을까?

강의가 끝나고 방문한 자양영당(봉양읍 공전리)은 1906년 유중교의 제자들이 그들의 정신적 스승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이었기에 선비들이 공부하던 흔적이 보인다. 극복재(克服齋), 박약재(博約齋)는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장소다. 논어 안연편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옹야편의 박문약례(博文約禮)에서 따온 말로 ‘사람의 충동은 예와 의로써 조정하라’, ‘지식은 넓게 가지되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뜻이다. 자양영당 옆에는 유중교가 살던 옛집이 있다. 구 교수는 집의 기둥 하나에서도 당시 시대상을 읽어낸다.

   
▲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 극복재와 박약재라는 현판이 보인다. ⓒ 박소연

“양반집을 지을 때는 사각형 모양의 기둥을 쓰는데 절에서나 쓰는 둥근 기둥이 양반집에 사용됐다는 것은 당시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는 방증이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선비들은 글만 읽을 수 없었다. 젊은 유생들은 유중교의 뒤를 이어 후학을 양성하던 유인석에게 찾아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 지역 선비들은 자신의 처지를 논의했어요. 이걸 처변삼사(處變三事)라 하는데 변란에 처했을 때 선비가 해야 할 세 가지 행동방식이죠.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는 것, 둘째는 망명하여 우리의 도의를 지키는 것, 셋째는 자결하는 겁니다. 지식인들이 위기 상황에 이런 논의를 했다는 거예요. 모임을 주재했던 유인석은 어느 것도 의리에 맞으니 상황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는 지침을 내려요.”

젊은 선비들은 양평에서 포군들을 이끌고 내려온 이춘영, 김백선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제자들은 영월에 있던 유인석에게 의병대장이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유인석은 상 중이라는 이유로 몇 번을 사양하다 의병장을 수락했다. 그리고 복수보형(復讎保形)의 기치를 내걸고 8도에 격문을 띄웠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전통을 보존하자는 뜻이다.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은 제천, 충주 등 충청도 지역뿐 아니라 경기, 강원지역까지 위세를 떨쳤다. 유인석은 의병 활동에 반대하는 관리를 처단하고 질서를 바로잡았다. 처형된 관리 중에는 의병 지도층의 친인척도 있었다.

숭의사에는 유인석의 지도로 의병활동을 했던 이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위패 옆에 세워놓은 깃발에는 유인석이 일으킨 의병을 일컫는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이 새겨져 있다. 위패 옆에는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즉 ‘비례불동(非禮不動)’이라 쓰인 깃발이 있다. 조선시대 어린이들의 교재인 사자소학에도 나오는 말이다.

깃발에는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19세기 말에 17세기의 명나라 마지막 황제 어필이라니, 고리타분해 보일지 몰라도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지키려 했던 유교적 전통 질서의 보존, 곧 보형(保形)이었을 터이다.

   
▲ 자양영당에서 제천 의병사를 이야기하는 세명대학교 구완회 교수. ⓒ 박소연

자양영당 오른편으로 돌아나가면 의병 후손들이 기증한 각종 자료가 채워진 제천의병전시관이 나온다. 이 전시관은 후기 제천의병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입구부터 의병장 안승우의 최후를 그린 재연영상이 나온다. 영상을 보던 구 교수는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라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고증이 잘못 됐다는 것이다.

1896년 제천의 남산에서 토벌군을 막던 안승우 부대는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만다. 최후를 예감한 안승우는 자신의 종사관이자 제자인 홍사구에게 몸을 피하라고 명령했지만 제자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아 함께 최후를 맞았다. 안승우가 32살이었으니 홍사구는 더 어렸을 게다. 구 교수는 의병들 사진을 보며 “여러분보다 더 어렸을 거다”라고 말했다.

제천이 토벌대의 손에 떨어지자 제천 의병은 큰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조정은 제천 의병을 역적으로 간주했다. 유인석은 임금께 상소를 쓴 뒤 강원도와 평안도를 거쳐 만주로 망명한다. 만주에서 계몽주의자들과도 힘을 합치는 등 이념을 넘어 오로지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15년 세상을 떠난다. 전시관의 옛 지도는 의병들의 퇴각로를 너무나 쉽게 보여주고 있지만, 후퇴하는 의병들의 피 토하는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성패를 어찌 말하랴, 우리는 깃발을 내릴 수 없다

제천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무렵과 1907년 고종 퇴위 때 다시 한번 일어났다. 상황은 을미년보다 훨씬 열악했다. 이강년, 김상태 등 의병장의 활약에도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일본 군경들은 의병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토벌을 위해 제천 시내 전부를 불태우기도 했다. 당시 영국 <데일리 메일>의 멕켄지 기자가 묘사한 제천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는데 이곳까지 현지취재를 나온 기자정신이 돋보인다.

   
▲ 1907년 일본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제천. 영국 <데일리 메일>의 멕켄지 기자가 촬영했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제천시내 한가운데 아사봉(관아 뒤쪽에 있는 동산)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 또한 빛났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서 거리로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완전한 벽하나, 기둥 하나, 된장항아리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 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의병 대부분은 이름 모를 산기슭에서 죽거나 일본군에게 잡혀 재판을 받았다. 조선의 사법권을 쥐고 있던 일본은 의병을 살인범이나 강도 등의 잡범으로 몰아 처형했다. 1908년 일본군에게 잡혀 처형된 의병장 이강년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成敗何搜說 성패를 어찌 말하랴
從容始踐言 조용히 일어나 말한 것을 실천했을 뿐
丹心培養驗 붉은 마음을 북돋은 덕분일 것이니
甘泣聖朝恩 나라의 은혜에 감격할 뿐이네

   
▲ 유중교의 생몰년마저 잘못 나와있는 안내판은 지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 박일규

이강년의 좌종사였던 이주승의 아들이자 유인석의 종사관 이조승의 조카인 이구영 선생은 일생을 바쳐 제천 의병 관련 기록을 정리해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을 펴냈다. 그러나 제천시는 물론이고 시민들도 제천이 이런 땅이라는 사실에 둔감한 듯하다. 안내표지판에 유중교(1832~1893)의 출생연도가 1821년으로 잘못 기록돼 있을 정도다. 유럽에서는 초중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들도 대부분 지역학을 교과목으로 개설해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고 한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의병들의 전쟁터는 풀숲에 덮여 사라진 지 오래이고, 유중교의 생가와 자양영당조차 찾는 이가 드물어 쓸쓸해 보인다. 문득 영화 <미션>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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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규 기자]
단비뉴스 편집부 & 환경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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