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이주민인권과 미얀마민주화 운동 소모뚜씨

20일은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이다. 인종이나 종교, 정치사상적 이유로 박해를 받고 떠도는 난민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뜻에서 지난 2001년 제정됐다. 국내에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각지에서 약 5천여 명의 난민신청자가 와 있지만 까다로운 난민 인정절차 때문에 대부분 불안정한 처지에 있다. 국내 체류 중인 난민과 이주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 미얀마 출신 소모뚜(39‧다문화활동가)씨를 지난 15일 경기도 부천시 심곡동 그의 집에서 만났다.

호랑이 꼬리를 잡은 남자

▲ 난민과 이주민을 위해 활동하는 미얀마 출신 소모뚜(39‧다문화활동가)씨. ⓒ 이청초

소모뚜씨는 스물한 살이던 1995년 3월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 온 후 미등록이주노동자로 눌러 앉았다. 미얀마에서 공과대학에 들어갔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했던 그는 경기도 김포의 한 박스공장에서 8년을 일했다. 그러다 2003년 외국인노동자 대상의 ‘고용허가제’ 시행을 앞두고 미얀마 대사관의 횡포에 맞서 싸우면서 ‘미얀마민주화운동가’이자 ‘이주민난민 인권운동가’로 변신하게 됐다. 

“당시 국내에서 3년 이상, 4년 미만 일한 외국인노동자들은 본국에 돌아갔다 재입국하는 경우 정식 고용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 버마대사관이 여권 갱신비를 명목으로 매달 6만원씩의 세금을 요구해 가난한 노동자들이 출국하기가 어렵게 됐죠.”

버마는 지난 88년 미얀마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소모뚜씨 등은 ‘국민 동의 없는 국호변경’이라며 옛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2003년 당시 ‘버마 이주노동자회’를 대표해 미얀마 대사관에 세금 경감을 요청했지만 대사관측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주노동자회 소속 버마인들과 함께 서울 한남동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매주 화요일 기자회견을 열어 대사관측의 불법행위를 외부에 고발했다. 3개월의 투쟁 끝에 노동자들은 세금의 절반만 내고 출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본국에서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랐다. 미얀마 대사관측이 그와 ‘버마이주노동자회’를 미얀마의 대우인터내셔널가스 공사장 폭파범으로 허위 보고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사건을 돌아보며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긴 셈”이라고 말했다. 꼬리를 잡으면 호랑이가 돌아서니 호랑이와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의 미얀마 속담이다. 그는 이전까지 한국 내 미얀마 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했지만 미얀마 대사관의 횡포를 계기로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뛰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버마 민주화와 이주노동자 인권신장을 위해 제대로 싸우자는 의미에서 ‘버마 이주노동자회’를 ‘버마행동 한국’으로 개명했다. 

버마행동 한국은 ‘프리 버마 캠페인(Free Burma Campaign)’ 등을 통해 미얀마 군부독재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모금운동을 통해 학교와 도서관을 세울 돈을 미얀마 현지단체에 전달하기도 했다.

국내 난민 인정, 하늘의 별 따기

난민에 대한 관심도 소모뚜씨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는 2004년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국정부에 난민신청을 냈다. 하지만 법무부는 ‘미얀마에서 민주화활동이 소극적이었으므로 귀국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며 2009년 그의 난민신청을 기각했다. 그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 2011년 대법원에서 난민인정을 받아냈다.

“한국의 난민 인정 절차에 문제가 많아요. 법무부가 난민을 담당하는데, 해당국가의 상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버마에서는 반정부 만화만 인터넷에 올려도 15년 이상 감옥형을 선고받거든요. 현지 사정을 좀 더 잘 아는 외교부가 난민관리를 맡고, 필요하다면 법무부와 협력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지난해 시리아와 콩고 내전 등의 여파로 난민의 수가 2,8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전 세계적으로 난민에 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국내에도 1993년 난민법 제정 이후 미얀마, 콩고 등 세계 각지에서 난민 신청자가 꾸준히 늘어 지난 5월 말 현재 5,485명에 이른다. 하지만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329명으로 신청자의 6%에 불과하다.

▲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난민신청자 5,485명 중에서 329명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불인정되거나 신청을 취소한 3,731명을 제외하고 1,442명이 난민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 난민인권센터

국내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박해를 받고 있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하고 면접도 거쳐야 하는데 미얀마 부족어나 아프리카 지역어 등을 통역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것도 대기자의 줄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난민 심사가 이뤄지는 6개월에서 1년 동안 취업을 금지한 것도 당장 생계가 곤란한 난민들에게 고통스런 장애물이다.

난민들이 원하는 것은 사회의 관심

“난민들이 진짜 원하는 건 관심이에요. 여기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달라는 거죠. 다들 난민이라고 하면 언론에 비치는 (대규모) 난민캠프 모습만 떠올리니 국내 난민의 어려움은 보이지 않는 거죠.”

그는 2011년 크리스마스 때 적십자에서 전국 각지의 난민들에게 라면 한 상자와 식용유, 참치를 나눠 줬는데 지난해와 올해는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고 말했다. 구호물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난민의 존재를 알아주는 것 자체가 고마웠는데, 그런 관심이 끊겼다는 데 서글픔을 느낀다는 것이다.

국내 대부분 난민들은 이주노동자가 밀집해 있는 부천, 인천 등에 모여 살거나 민간단체 ‘피난처’와 ‘코람데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지내고 있다. 시민단체인 난민인권센터는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오는 9월 정부가 인천 영종도에 난민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난민지원센터’를 열지만 지난 한해에만 1,100여 명의 난민신청이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소모뚜씨는 “난민은 언제 한국을 떠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더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며 “뭔가를 달라는 게 아니라 관심을 갖고 인권을 존중해달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소모뚜씨는 이주노동자의 인권신장을 위해 <이주민방송(Migrant World TV)>의 대표와 다큐멘터리 제작자 등으로 활동해 왔으며 이주민의 삶을 노래하는 ‘스톱크랙다운(Stop crack down:단속중단)’ 밴드활동도 10년째 하고 있다. 또 20여명이 함께 꾸려가는 다문화노래단 ‘몽땅’에서도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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