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스타 성우 홍시호가 말하는 ‘입과 말’의 진실

“TV에서 해주는 외국영화란?”

“입과 말이 따로 노는 것.” 

▲ 개그맨 박영진 씨가 성우 비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 KBS 화면 갈무리

지난 2일 방송된 한국방송(KBS) 2TV의 인기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이다. 더빙(목소리 입히기)하는 성우의 대사가 배우의 입모양과 안 맞기 일쑤라는 뜻이다. 방청객들은 공감한다는 듯 크게 웃으며 박수쳤다. 하지만 방송이 끝난 뒤 개콘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없는 풍자는 폭력이라는 등의 비판적 의견이 줄을 이었다. 게시판 글 100건 중 83건이 이 장면에 대한 비난이었고 온라인에서는 성우 비하논란이 번졌다. 문화방송(MBC)출신의 정재헌 성우도 개그맨 박영진씨의 풍자는 외화 더빙의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한 사실 왜곡이라며 사과를 요구하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외화 더빙의 현실이 과연 어떻기에 성우들과 많은 시청자들이 이렇게 발끈한 것일까? 지난 7일 서울 여의도의 한 녹음실에서 28년 경력의 KBS출신 스타성우 홍시호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홍씨는 유덕화, 톰 크루즈 등 유명 외국배우들의 우리말 더빙을 도맡아 하는 프리랜서 성우로 지난 2009KBS라디오 연기대상 남자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각광을 받고 있다.

입과 말이 따로 노는 것은 옛날 옛적 이야기

아주 옛날에는 말과 입길이가 안 맞기도 했는데 요즘은 딱딱 맞을 수밖에 없어요. 기본적으로 성우들이 입을 잘 맞추고 컴퓨터로 마무리 작업까지 하기 때문이죠.”

홍씨의 설명이다. 입길이란 화면에서 입이 움직이는 시간을 말하는 방송계 속어인데, 성우들은 녹음에 앞서 캐릭터의 표정과 연기를 분석하고 대사와 입길이를 맞추기 위해 많은 연습을 하기 때문에 입과 말이 딱딱 맞는다는 것이다. 녹음 중 성우의 목소리가 입길이에 비해 짧거나 넘치면 그 부분은 몇 번이고 다시 연기한다고 한다. 특히 극장용 영화나 만화영화는 TV에 비해 훨씬 큰 스크린에서 상영되기 때문에 0.5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영시간이 1시간 반 정도인 작품에서 주연을 맡은 성우들은 거의 20시간을 녹음한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성우들의 내레이션(설명)이나 만화영화 더빙 등이 배우, 개그맨에게 많이 넘어 가는 추세다. 지난 5일 개봉한 쾌걸조로리의 대대대대모험은 투니버스라는 만화영화채널에서 방영하던 쾌걸 조로리를 극장판으로 바꾼 만화영화다. 원작에서 주인공 목소리를 연기했던 성우 김정은(40)씨는 극장판에서 조연을 맡았고 주인공은 개그맨 정태호(35)와 신보라(26)씨가 연기했다. 그러나 주연급의 목소리 연기에 대한 관객 반응은 별로 좋지 않다.

성우 입장에서 그분들이 우리 일을 뺏는다고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더빙이나 내레이션을 할 때 너무 비전문가의 느낌이 들더라고요. 우리말은 정말 어렵습니다. 정확한 장단음과 발음이 분명히 있는데 전문가(성우)가 아니면 그것을 못 살리더라고요. 배우 등 유명인의 인기를 활용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이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더빙의 질이 떨어지면 작품의 인기도 함께 떨어지니까요.”

▲ 배우 김영옥 씨는 성우 출신답게 MBC 예능 '진짜사나이'에서 안정적인 내레이션을 선보였다. ⓒ MBC 화면 갈무리

소녀시대와 카라, 씨스타, 시크릿 등 여자 아이돌스타들을 내레이터로 썼던 MBC의 예능프로그램 진짜사나이는 지난 2일과 9일 배우 김영옥씨를 기용해 호평 받았다. 화면 속 군인들의 상황에 몰입하게 만드는 편안한 목소리와 적절한 감정 표현이 좋다며 김씨를 고정 내레이터로 해 달라는 의견이 시청자 게시판에 잇달아 오르기도 했다. 시청자들이 배우로만 알고 있는 김씨는 사실 기독교방송(CBS)MBC의 성우 출신이다. 그녀의 내레이션이 영상과 잘 어울렸던 데는 이유가 있던 것이다.

80년대 성우 전성시대’, 방송사들 외화 줄이면서 사양길

▲ 단비뉴스와 인터뷰하는 홍 성우의 모습. ⓒ 박기석
홍씨는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시절 탤런트, 개그맨을 꿈꾸는 등 몸연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졸업 후 연극을 했는데, 주위에서 성우시험을 권하기에 응시했다가 1987KBS 성우가 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우들의 전성시대라고 볼 수 있었다.

지금 연기자로 활동하시는 분들 중 성우 출신이 많습니다. 사미자씨, 김용림씨가 떠오르네요. 라디오 드라마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는 분들의 인기가 대단했죠. 1980년대에는 TV외화가 인기가 있었어요. ‘에이(A) 특공대’, ‘전격제트(Z)작전’, ‘브이(V)’, ‘욕망의 계절등 이 큰 인기를 모았죠. 1980년대 후반 제가 한창 일을 많이 할 때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TV에서 매일 외화를 했어요. 더빙 때문에 다른 일은 못 할 정도였죠.”

그러다 1990년대에 예능프로들이 앞 다퉈 생겨나면서 성우들의 인기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89월 서울방송(SBS)에서 시작했던 김혜수 플러스 유라는 토크쇼가 기억나네요. 11시에 방송했던 것 같은데, 사실 그 시간대는 외화를 방영하던 시간이었어요. 토크쇼가 인기를 끌자 다른 방송국에서도 이런 예능을 많이 편성하게 됐죠. 외화를 내보내려면 저작권료와 10여명 성우들의 더빙 등 돈이 많이 드는데 예능은 연예인 서너명만 있으면 되니까 제작비가 적게 든 거죠. 이때부터 외화가 점점 줄어 2005년부터는 눈에 띄게 편성이 적었던 것 같아요.”

외화더빙 일이 줄어든 대신 만화영화가 어느 정도 새로운 일거리를 준 것은 다행이었다. 홍씨는 슬램덩크의 강백호, ‘캡틴테일러의 테일러 함장, ‘원탁의 삼총사의 발리언트 왕자 등 인기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도맡았다. 일본 만화영화에 빠진 시청자들은 팬클럽을 결성, 그에게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도 했다.

2013년 현재 사단법인 한국성우협회에 소속된 성우들은 750명 정도. 이들은 KBS라디오의 일일시트콤 남남북녀를 포함한 몇몇 라디오 드라마와 외화 및 애니메이션 더빙 외에 일반기업의 홍보방송, 방송광고, 지하철을 포함한 공공시설 안내방송 녹음 등 다양한 일을 한다. 홈쇼핑과 게임 등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홍씨도 게임 창세기전시리즈에서 목소리 연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현재 투니버스에서 방영되는 만화 ‘원피스의 샹크스, ‘블리치의 참월 역을 맡고 있다. 지난 3월부터는 연기학원의 대표를 맡아 연기자나 성우를 꿈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홍시호 성우가 대본을 읽으며 학생들에게 발성법을 가르치고 있다. ⓒ 안형준

프랑스가 영화 자막 대신 더빙을 의무화한 이유는

지난 1994MBC에서 주말의 명화등 기존 외화들을 성우의 더빙 없이 자막 처리할 것을 결정한 일이 있다. 젊은 세대들이 외화를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한글 자막을 입혀 방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성우협회는 이를 생존권의 문제로 보고 파업을 강행, 2개월 만에 MBC의 항복을 받아낸 일이 있다.

그래서 방송사들은 요즘도 외화에 우리말 더빙을 해서 방영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외화 방영 자체가 워낙 줄어든 상황이다. 성우협회 이근욱 회장에 따르면 MBC의 경우 씨에스아이(CSI )시리즈가 끝난 뒤 외화를 아예 편성하지 않고 있다. 당시 성우들의 자막처리 반대 파업이 요즘 일어났다면 시청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성우들의 집단이기주의’,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등 비난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홍씨는 자막방송과 관련해 달리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은 청소년과 대학생만 보는 게 아닙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외화를 즐겨 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자막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빙의 첫째 목적은 이 때문입니다. 또 우리말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더빙을 의무화한 나라가 많습니다. 프랑스는 영화관에 걸리는 영화들도 더빙을 합니다. 점점 말들이 이상하게 바뀐다고 하는데, 그럴수록 정확한 우리말 더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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