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산재피해 노동자 영화 ‘또 하나의 가족’ 윤기호 PD

▲ 영화 <또 하나의 가족> 포스터. ⓒ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 잘 버는 기업, 삼성전자. 이 회사의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줄줄이 백혈병과 암에 걸렸다. 작업과정에 쓰인 독성물질 탓으로 의심됐지만 회사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잡아뗐고, 노동부도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맥없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아버지는 너무 억울해서 택시운전도 내팽개치고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다. 하나 둘씩 드러나는 증거에도 회사는 꿈쩍 않는다. 힘없는 아버지는 가슴을 친다.

“산재라는 것을 근로자 보고 입증하라고 하는데, 정보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한국 최초의 ‘산재 블록버스터’, 좋은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지난달 17일 서울 용강동의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윤기호 프로듀서(36)는 지난 3월 시작된 촬영이 강원도 속초에서 이틀 전에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메가폰을 잡은 김태윤 감독과 함께 영화 <또 하나의 가족> 자금모집(펀드레이징)과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투자사도 없고 초기 자금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촬영을 시작하면서 ‘불가능’이란 말을 100번은 들었단다. 거대 재벌 삼성과 맞서는 일인데 겁나지 않느냐는 얘기도. 하지만 별 탈 없이 ‘일단’ 마지막 촬영까지 마쳤다.  

▲ 윤기호 제작PD. ⓒ 방글아

십시일반 정신, 대안자본으로 만든 영화

“직접 영화를 만들진 못해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어요. 영화 제작을 위한 첫 투자는 대치동 학원가의 선생님들이 해줬고요.”

기획 당시의 우려대로 전문적인 투자사를 구하지 못하자 제작진은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를 만들어 모금에 나섰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킥스타터(KickStarter)같은 크라우드펀딩(대중모금)회사들이 자본을 모으듯, 영화 제작비를 시민들로부터 공모한 것이다. 국내 크라우드펀딩 전문사인 ‘굿펀딩’과 자체 모금기구인 ‘제작두레’가 실무를 맡았다. 놀랍게도 테이프를 끊은 이들은 ‘우리나라 사교육의 중심’이라는 서울 대치동 학원가의 ‘80년대 학번’ 강사들이었다. 이어 일반 직장인들이 줄줄이 모금에 참여했다. 이런 영화는 꼭 만들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한번은 제작비가 바닥나 현장 스탭들에게 중도금을 못 줄 형편이 됐는데 30대 초반의 한 직장인이 ‘같은 회사 과장과 모은 돈’이라며 1억 원을 내놓은 일도 있다. 돈이 없어 위태위태했던 순간들은 그렇게 기적적으로 넘어갔다. 제작위원회가 굿펀딩과 제작두레를 통해 지금까지 모은 돈은 약 5억 원, 6000명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심리적 보상’ 외에 아무 것도 물질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기부’와 달리 이 크라우드펀딩 방식은 모금액에 따라 시사회 초대권, DVD, 엔딩크레딧 등을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선구매' 의 성격을 띤다. 5억 원을 추가로 모금하는 2차 펀딩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제작진은 영화의 ‘엔딩크레딧(만든사람들 명단)’에 5만 원 이상 모금 참가자들의 이름을 모두 올릴 예정이다.

▲ <또 하나의 가족> 원주 법원씬 촬영 기념사진. ⓒ 또 하나의 가족 공식 페이스북

‘영혼 있는 영화’들의 성공도 제작에 한몫

촬영에 불가피한 경비 외에 출연료 등은 거의 ‘외상’으로 했다. 그래도 주연급인 배우 박철민(아버지 한상구역)씨와 김규리(노무사 유난주역)씨가 '대본도 좋고 다 좋은데 왜 안해야 돼?'라고 되물으며 흔쾌히 합류했다고 한다. 충무로 영화판에서 ‘거물’로 꼽히는 최영환 촬영감독은 지난해와 올해 <도둑들>과 <베를린>을 통해 이름을 날렸지만 편당 1억 원 이상의 개런티를 포기하고 이 영화에 기꺼이 참여했다. 윤PD는 “나중에 500만원 주겠다며 영입했는데, 결국 그 돈도 영화에 투자하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말했다. 아동학대와 사학비리 등을 폭로한 <도가니>,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26년>, 사법부를 고발한 <부러진 화살>, 고문을 다룬 <남영동 1985> 등 일련의 ‘영혼 있는 영화’가 나름의 성공을 거둔 덕을 본 것 같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 영화가 흥행해서 삼성이 잘못을 고치게 되면 삼성 직원들이 가장 크게 득을 볼 텐데, 앞으로 우리 가문에선 3대째 삼성 직원이 없을 것 같네요. (웃음) 영화 제작두레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도 삼성 직원들이 꽤 많아요.”

한양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빨간 쫄티를 입고 다니는 날라리’로 불렸다는 윤 PD는 서른살에 영화 <마린보이>의 PD로 영화계에 입봉했고 지난해 배우 김명민을 내세운 마라톤영화 <페이스메이커>를 제작해 주목받았다. 요즘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든다는 이유로 자신을 ‘착한 놈’으로 보는 이들이 생겨 부담스럽다는 그는 영화 속 노무사 난주에게 감정이입이 되지만 삼성의 이보익 실장(김영재 분)에 대해서도 ‘가족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친구들을 보는 듯 연민을 느낀다고 말했다.  

▲ <또 하나의 가족> 제작두레 참여하기. ⓒ 또 하나의 가족 공식 페이스북

한편 이 영화의 제작두레 참여는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공식 홈페이지(http://anotherfam.com/)에서 2만원부터 할 수 있다. 모금된 돈은 영화의 후반 작업인 편집, 음악, 믹싱 등에 필요한 비용과 미지급된 인건비, 장비 대금 등으로 쓰일 예정이다. <또 하나의 가족>은 오는 9월 중 전국 300개관 이상의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은 250개관 정도로 개봉했지만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상영관이 400개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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