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불면의 밤' 자정부터 새벽까지

거울 앞 여성들이 분주하다. 화장을 지우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나란히 세수하고 이도 닦는다. 잠자리에 들기 위한 준비로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밤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전북대학교 문화회관 1층 여자 화장실은 이처럼 ‘불면의 밤‘을 준비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밤샘 준비를 마친 사람들의 발길은 심야 상영 프로그램인 ’불면의 밤‘ 상영관으로 향했다.

지난 4월 27일, 개막 사흘째를 맞은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JIFF)는 이렇게 자정이 지나도  계속됐다. ‘불면의 밤’은 지난달 26일과 27일 밤 이틀 간 진행됐다. ‘불면의 밤’ 첫째 날인 26일에는 ‘발리우드의 밤’을 테마로 지난해 인도에서 주목 받았던 <하나는 나, 하나는 너>, <히로인>, <돌격 라토르> 등 3편의 인도영화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상영됐다.

 

▲ 지난달 27일 '불면의 밤' 첫 번째 상영작 <에바 반 엔드의 위대한 순결상실>. ⓒ 전주국제영화제 공식홈페이지

단비뉴스 취재진은 지난달 27일 마련된 두 번째 ‘불면의 날’에 동참했다. 이날 주제는 여러 장르들을 한 편에 뒤섞어 담아낸 영화를 소개하는 ‘장르 트위스트의 밤’. <에바 반 엔드의 위대한 순결상실>, <버닝 붓다맨>, <어쨌든 존은 죽는다> 등 세 편의 영화가 관객들을 만났다.

“상영 10분 전입니다!”

첫 번째 영화 상영을 알리는 목소리가 상영관 앞 로비에 울려 퍼졌다. 바쁜 걸음으로 출입구에 몰리는 관객들과는 달리 여유롭게 차례를 기다리는 한 여성이 있었다. 매년 빠짐없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왔다는 이영주(32•서울)씨는 “이왕 왔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서 ‘불면의 밤’을 찾았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영화를 봤지만 잘 시간이 지났는데도 영화에 대한 갈증은 여전한 모양이다.

이날 ‘불면의 밤’을 찾은 관객 수는 860여명. 상영 시작이 임박하자 로비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상영관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떠들썩하던 로비에는 금세 정적이 감돌았다.

밤 12시 15분, 관객들이 차츰 영화에 몰입할 즈음 상영관 앞 로비가 다시 부산해졌다. 이른바 ‘JIFF 지기’라고 불리는 영화제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뭔가를 나른다. 영화 사이 쉬는 시간에 관객들의 허기를 달래줄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JIFF 지기’들은 밤을 잊은 860여명의 관객들을 위해 또 다른 ‘불면의 밤’을 보냈다. 

 

▲ 관객들에게 줄 간식을 준비하는 JIFF지기들. ⓒ 김혜영

 
'장르 트위스트의 밤' 관객도 트위스트

첫 영화 상영이 끝나고 두 번째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 관객들은 간식으로 출출함을 달랬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체 리듬의 공세를 쉽게 떨치진 못한다.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잠시라도 엉덩이 붙일 곳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혀 지친 기색이 없어 보이는 중년의 관객이 눈에 띄었다. 머리가 희끗한 서송원(57) 씨는 “오늘 마누라가 서울로 여고동창모임에 간 틈을 타 이곳에 왔다”며 ‘불면의 밤’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에바 반 엔드의 위대한 순결상실>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화합할 수 없고, 소통 없는 가족에 대한 영화였거든요. 이게 남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 이야기예요."

서 씨는 아내가 마침 집을 비운 덕분에 ‘불면의 밤’을 찾을 수 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불면의 밤’을 통해 아내에 대한 해방감과 그리움을 동시에 겪은 서 씨, 이 날의 테마인 ‘장르 트위스트의 밤’에 어울리는 관객이었다.

 

▲ 관객들이 상영 쉬는 시간에 간식을 받고 있다. ⓒ 김혜영

전주국제영화제는 분명 ‘국제’ 영화제였다. 영화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여러 나라의 말들이 수시로 귓전에 들려온다. 영화제를 취재하러 온 외국인 파워 블로거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데이비드 옥슨브릿지(세계영상위원회 총회 인터내셔널 코디네이터)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5년째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으면서 불면의 밤 ‘마니아’가 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심야 상영(midnight session)은 꼭 참석한다. 다양한 장르 영화를 볼 수 있는 ‘불면의 밤’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심야상영의 분위기가 좋다. 관객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심야 상영에서는 상영 후 박수와 환호도 엄청나다.”

 

▲ 일부 관객들이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로비 의자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 김혜영

영화냐, 잠이냐? 본격적으로 갈등이 몰려오는 새벽 4시 반. 마지막 영화가 채 끝나기 전인데도 사람들이 한두 명씩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쏟아지는 잠을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숙소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문화회관 로비 벤치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최희원(32•여) 씨도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지 못한 경우다. 

“지금까지 전주국제영화제 불면의 밤은 음악이면 음악, 호러면 호러로 장르가 명확했어요. 하지만 이번 ‘장르 트위스트’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웬만하면 끝까지 즐기고 싶은데 피로와 지루함이 겹쳐 중도에 포기했죠.”

14년째 이어져 온 ‘불면의 밤’은 그 동안 매년 하나의 명확한 장르영화를 선보였다. ‘장르 트위스트의 밤’은 다양한 장르가 뒤섞인 영화를 ‘장르 트위스트’라는 주제로 묶었다는 점에서 색다르고 의미 있는 시도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획이 모든 관객을 만족시키진 못한 모양이다. 

불면의 밤, 밤, 밤…

어둠이 걷혀가는 새벽 5시 20분. ‘불면의 밤’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릴 시간이다. ‘하나의 영화에 다양한 장르’라는 이번 주제처럼 수면 욕구를 억제하며 긴 밤을 버텨낸 이들에게 이날 ‘밤’이 던져준 의미는 각양각색이었다.

“다른 영화제에서는 심야상영 때 관객들을 억지로 깨어있게 하려는지 무섭고 자극적인 영화들을 많이 편성해요. 전주국제영화제 불면의 밤에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새로운 형식미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상영돼서 좋아요."

대학교 영화제작동아리 동료들과 함께 왔다는 김상정(21)씨는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도 이번 ‘불면의 밤’ 예찬론을 폈다. 그녀는 버스에서 푹 쉬겠다며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채영호(27)씨도 “심야 영화는 관객들이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며 ‘불면의 밤’이 가진 매력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빠져나간 상영관에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채씨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불면의 밤을 활용했다”며 “오늘 오전 첫 영화가 상영할 때까지 자리를 좀 더 지키겠다”고 말했다.

실제 전주국제영화제 미디어팀 김성준 팀장은 ‘불면의 밤’ 프로젝트‘를 기획한 취지는 “타지에서 온 관객들을 위해 그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고 밤 시간을 보낼 공간을 만들어주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오는 3일까지 진행된다. ⓒ 홍우람


지난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의 ‘미드나잇 세션’으로 시작한 심야상영 프로그램 ‘불면의 밤’은 내년이면 15돌을 맞게 된다. 이번 ‘불면의 밤’ 상영작들은 이달 3일까지 전주국제영화제 일반 상영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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