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있는 서재] 은희경 ‘새의 선물’

▲ 소설 <새의 선물> 표지.

20대 초반의 나는 철부지 여대생이었다. 사회 현안들에 평균도 안 되는 관심을 가진 소시민으로 20대의 반절을 보냈다. 나의 관심은 온통 옷, 맛집, 연애, 학점에 쏠려 있었다. 그때 나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성찰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 주인공 진희는 나와 다르게 열두 살에 세상물정을 일찍 알아버린 조숙한 소녀였다. 어린 시절 자신을 기둥에 묶어두고 집을 나갔다 돌아와 자살한 엄마가 그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런 아픔 때문일까? 그녀는 위기 앞에서 침착하다 못해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법을 일찍 터득했다.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남에게 ‘보여지는 나’로 분리해 대응했다. 슬픔 앞에서도 이 분리 방법을 이용해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반면 나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같은, 혹은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친구와 싸울 때도 화나고 슬픈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순진한 소녀였다. 그런 내가 변한 것은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였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생각에 일부러 한국 사람을 멀리한 나는 한때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외국인 친구들과는 깊은 우정을 나누지 못하고 이질감을 느꼈다. 그때쯤이던가, 내가 라디오를 친구 삼아 다시 듣게 된 것이. 고등학생 시절 즐겨 듣던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외로움은 조금씩 사라져갔고 나는 ‘바라보는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보는 나’에 집중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되자, 그저 자신의 문제에만 번민하는 ‘평범한 나’에서 다른 사람의 고민뿐 아니라 사회의 고민도 조금은 들여다볼 줄 아는 시민으로 성장했던 것 같다. 내가 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나를 보는 시선도 나의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제야 깨우쳤으니…… 한심하다 해야 할까, 다행이라 해야 할까?


글쓰기가 언론인의 영역이라면 글짓기는 소설가의 영토입니다. 있는 사실을 쓰는 것이 글쓰기라면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게 글짓기입니다. 그러나 언론인도 소설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단비뉴스>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서재’ 개관을 기념해 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소설을 읽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이봉수 교수 첨삭을 거쳐 이곳에 실립니다. 우선, 방학 동안 학생들이 소설을 읽고 써낸 에세이 중 몇 편을 골라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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