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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써지지 않을 때
[소설이 있는 서재] 김훈 ‘풍경과 상처’
2013년 03월 15일 (금) 12:22:52 박다영 기자 dureooi@naver.com

 식탐이 강해졌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정신없이 먹어치운다. 음식을 삭이느라 뱀처럼 늘어져있다 보니 붙는 건 군살이다. 살이 찌지 않아 고민스럽던 날도 있었건만 이젠 ‘말라깽이’라는 별명과 작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체중계 바늘이 휘청휘청하다 멈췄다. 공부한답시고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 불어난 체중이라고 애써 자위해보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으니 위안이 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더니 책 읽는 습관도 게걸스러워진 듯하다. 취향과 상관없이 이것저것 읽다 보니 잡식성이 됐다. 맛있는 음식을 아껴먹듯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꼭꼭 씹어가며 포만감을 느끼고 싶건만 그저 우겨 넣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지만 잡히는 게 없다. 보고 읽은 만큼 배출하고 싶은데 머리 속 생각의 회로는 오작동만 하는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과학시간에 납땜을 잘못해 깜빡거리는 꼬마전구를 닮았다.  

   
▲ 김훈 <풍경과 상처>

깊숙한 곳에 대한 성찰 없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 탓일까? 김훈은 그의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에서 울진 성류굴을 찾아갔다가 반성했다. 부엌 아궁이보다 더 깊은 곳, 인간 마음의 맨 아래 지층까지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제 발 밑을, 제 존재의 심연을 보지 못하는 자가 ‘말’을 하며 산다는 것을 자책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지만, 남달리 지혜로운 안목, 곧 ‘지안’(智眼)과 사물을 분별하는 마음의 눈, 곧 ‘심안’(心眼)이 있다. 자연동굴의 땅 밑 암흑 속에서 수억년간 썩은 물이 시즙(屍汁)처럼 배어나온 풍경을 볼 줄 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저 보이는 것만 겨우 식별하는 육안뿐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니 글에도 알맹이가 없다. 

사고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글을 쓰고 싶은데, 내 사고는 금방 바닥에 이르고 마니 어쩌랴? 결국 생각의 깊이를 늘려가는 수밖에. 그리고 남의 생각을 내 것처럼 글로 옮기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뱉어낸 내 이야기라야 남들이 잠깐이라도 귀 기울여 줄 테니까.

글을 쓸 때도 식탐을 하듯 욕심을 내지 말아야겠다. 식탐에 사로잡혀 쉬지 않고 먹어댄 뒤 뱉어내지도 못하고 명치를 쿡쿡 찌르는 고통까지 경험하지 않았나. 내게 필요한 건 채움이 아니라 비움일지도 모른다. ‘여백’은 텅 빈 결핍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거대한 생명의 자궁이라고 어떤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정신적 허기와 목마름으로 나만의 우물을 파고 나만의 생각을 길어 올릴 수 있기를…….


글쓰기가 언론인의 영역이라면 글짓기는 소설가의 영토입니다. 있는 사실을 쓰는 것이 글쓰기라면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게 글짓기입니다. 그러나 언론인도 소설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단비뉴스>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서재’ 개관을 기념해 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소설을 읽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이봉수 교수 첨삭을 거쳐 이곳에 실립니다. 우선, 방학 동안 학생들이 소설을 읽고 써낸 에세이 중 몇 편을 골라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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