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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정의’ 집착하면 독이 될 수 있다
[마음을 흔든 책] 장은주 ‘정치의 이동’
2013년 03월 06일 (수) 01:46:49 박정헌 기자 foxmulder7@naver.com

지난해 총선과 대선을 치르면서 ‘경제민주화’는 여야 모두의 ‘애창곡’이 됐다. 특히 ‘분배정의’만 실현되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주장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장은주(49) 영산대 교수는 이 ‘분배 패러다임’과 결별해야 참된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출간한 <정치의 이동>에서 장 교수는 “정의를 분배문제로만 보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이뤄지는 분배투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접근은 경제 위기가 닥칠 경우 복지국가라는 토대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의라는 개념을 분배문제에 국한시키는 대신 부당한 권력관계를 바로잡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는 문제로 끌어 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능력만큼 나누면 정의로운가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표지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분배정의의 개념이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일반적 정의’와 ‘부분적 정의’로 구분한 것 중 부분적 정의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부분적 정의는 구체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올바름인데, 합당한 몫보다 더 많거나 적지 않게, 적절히 가지는 게 정의라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규제 원리로서 정의를 강조했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가 말한 부분적 정의에 매달려 경제적 차원의 논의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장 교수의 불만이다. 장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분배정의를 말하는 경우 능력주의, 즉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의사나 변호사가 청소부보다 많은 돈을 벌더라도 사람들이 부당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경쟁이 공정하다면 참여자들 사이에 능력에 따른 불평등이 생기더라도 합리적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회에서 오로지 능력만을 기준으로 재화의 분배가 이뤄진다면 낡은 계급구조를 허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반칙’과 ‘특권’ 철폐에 대한 요구는 바로 철저한 메리토크라시 정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대중적 갈망이 표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사회의 진보세력도 메리토크라시의 틀 안에서 분배정의와 공정사회를 외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장 교수는 “메리토크라시 정의야말로 우리가 폐기해야 할 사회병리현상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자칫하면 극단적인 학벌주의와 학력에 따른 임금차등화, 능력 계발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토크라시’와 ‘클렙토크라시’의 함정

   
▲ 정치의 이동 표지

메리토크라시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승자독식을 정당화하고 패자는 사회적으로 배제하면서 ‘과두독점특권체제’인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로 이어진다. ‘능력에 따른 공정한 분배’라는 외피 속에 소수의 독점이 정당한 것처럼 포장되는 것이다. 클렙토크라시 사회의 기득권층은 자신이 누리는 특권이 정당하고 정의롭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뻔뻔하고 당당하다.

장 교수는 능력에 따른 차등분배가 정의라는 믿음은 그 틀을 결정하는 원천적 권력의 문제, 즉분배할 대상을 누가 결정하며 관련 당사자가 분배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는지 등을 도외시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참된 정의는 재화의 할당 문제가 아닌, 지배와 억압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결국 핵심 쟁점은 민주주의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의가 ‘부당하고 자의적인 권력관계’라고 진단한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부당한 권력 행사와 자의적인 지배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적 분배에 집착하기보다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 모든 사회 구성원의 평등과 존엄을 보장하고 인권을 실현하는 것, 즉 민주주의의 구현이 정의의 초석이 된다는 주장이다.

민주주의와 통하는 복지국가

올바른 민주주의는 복지국가와 이어진다. 구성원들이 예외 없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노동계급 중심주의’ 같은 생산 및 분배 패러다임의 잔재가 설 자리는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현재의 경제시스템에서는 단일한 속성과 이해관계를 가진 거대 노동계급을 더 이상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복지국가가 노동계급만의 특별한 관심사가 되어서도 안 되며, 그것은 모든 시민을 아우르는 공동의 기획이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 장은주 교수

이런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사회보장국가’다. 국가는 모든 시민이 잠재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물질적 불안정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기여와 능력에 상관 없이 일단 기본적 수준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분배정의의 실현을 통해 더 많은 물질적 복지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고,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핵심이다.

저자는 마이클 샌델부터 마르크스까지, 사회민주주의부터 동학까지 넘나들며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설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논의가 너무 방대하다 보니 허점도 눈에 뜨인다. 신자유주의를 우리나라 전통 유교의 가치관과 결부시키는 부분은 설명이 부족해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진정한 민주공화국 실현’을 주장하는 대목은 다소 피상적으로 서술됐다. 그래서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느낌이 커진다. 한국 고유의 정치철학 모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저자조차 서구의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상도 준다. 그러나 이 책은 유행처럼 경제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에게 되짚어 성찰할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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