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신형철 문학평론가
주제② 문학이 삶을 다루는 방법

문학은 우리에게 삶을 둘러싼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이를 문학의 ‘인식적 가치’라고 설명한다. 문학작품을 통해 우리는 내면에 존재하는 본능·충동·욕망·사랑으로 얽히고설킨 삶의 씨줄날줄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작품은 우리 삶을 어떻게 담아낼까? 신 평론가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문학이 삶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강연했다.

사건과 사고의 차이, 그리고 문학

문학이 삶을 다루는 키워드는 ‘사건’이다. 문학작품이 인식적 가치를 지니기 위한 원칙은 ‘사건을 다룬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신 평론가는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기사 가치에 대한 설명으로 ‘사건’을 정의했다. 개가 사람을 물면 ‘사고’다. 반대로 사람이 개를 물면 ‘사건’이 된다. 단순한 사고는 사고 경위에 대한 구체적 사실관계만 확인한 뒤 이를 처리하면 된다. 개에 물린 사람은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개는 적절한 조처를 받으면 사고처리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개를 문 ‘사건’은 단순한 처리로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다. 왜 사람이 개를 물었는지 분석하고 해석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처리를 넘어선 ‘해결’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건’에서는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진실을 통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퇴행하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 2001년 미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던 9∙11 테러는 사고일까 사건일까? 사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근본주의 이슬람 교도들이 광기 어린 자살 테러를 저질렀다’로 정리하고 이슬람을 악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러나 9∙11테러를 사건으로 본다면 이슬람주의자들이 테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진실을 파악하려 할 것이다.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당시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과 국제정세 등을 분석하고 해석하게 된다.

해결은 이런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시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택 (Susan Sontag)은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우리 모두 슬퍼합시다, 그러나 바보는 되지 맙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건을 사고로 처리하고 성찰하지 않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대개 사고를 다룹니다. 외계인이나 악당이 침입하면 이들을 제압하고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서사구조를 갖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내부 문제를 은폐하고 외부의 적을 만들어 처리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식으로 우리의 성찰을 방해하죠.”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을 찾은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강연을 하고있다. ⓒ 허정윤

손을 쓰기엔 늦어버린, 삶을 관통하는 파열선

좋은 소설 속에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이 거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주인공은 사건을 해석하기 시작하고 몸을 부딪혀가며 진실을 발견해낸다. 진실이 드러나면 주인공은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소설의 기본문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법은 장편과 단편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고 신 평론가는 설명했다.

“우리의 삶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편소설은 이 선들을 조합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로 잘 알려진 미국 소설가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에세이집 <크랙업>(Crack-up: 파탄)의 설명을 토대로 신 평론가는 장편소설의 10분의 1 분량밖에 되지 않는 단편소설은 우리 삶을 이루는 여러 선들 중 하나를 다룬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지나는 선들 사이에 서 있다. 가령 24시간의 ‘삶’이라는 원(圓)이 있다면 어떤 선이 개인의 시간 사이로 침투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개인한테 교통사고가 났다면 개인의 삶 속에 선이 침투해 지나간 것이다. 이와 같은 교통사고, 재해, 경제적 파산 같은 형태의 선을 피츠제럴드는 ‘절단선(Rupture)’으로 명명했다. 절단선은 우리 눈에 잘 보인다. 사고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는 이 사고를 예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선도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어느 순간 개인의 삶을 관통하기 시작한 선이 ‘파열선(Crack)’이다. 건물에 금이 가고 있지만 알지 못한 채 그 건물에서 생활하다 붕괴되면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가 그 예다. 그리고 파열선이 지나간 이후에는 우리는 파열선이 침투하기 시작한 처음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피츠제럴드는 그의 책에서 ’손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당신이 어떤 측면에서는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그때가 되고 나서야 당신은 그것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 신형철 평론가의 강연을 듣고 있는 저널리즘스쿨 학생들. ⓒ 허정윤

통념을 흔들어버리는 게 소설의 ‘응답’

“단편소설의 조건은 우리 삶을 지나는 ‘파열선’을 포착해서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처음 순간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신 평론가는 우리 삶을 관통하는 모든 선을 담으면 소설이 되지만 단편은 이 모두를 담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 선 중에서 단편소설은 파열선, 즉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침투하고 있는 선을 문학작품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파열선은 우리 삶에 치명적이기에 이 선을 잘 보여주면 단편소설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단편을 읽는 독자는 흔히 ‘이게 끝이야’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단편은 이 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선을 잘 파악해 소설 속에 녹여낸 훌륭한 작가로 신 평론가는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미국의 레이먼드 카버를 꼽았다.

“장편은 사건에서 진실과 해석, 퇴행의 과정에 응답의 과정이 포함됩니다. 이런 과정을 담은 소설이 좋은 소설입니다.”

장편소설은 다르다. 사건이 있고 진실이 있다면 그 뒤에는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진실에 대한 ‘응답’이다. 이런 응답을 잘 담은 소설로 신 평론가는 영화화한 독일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와 이창동 감독의 <시>를 꼽았다. <더 리더>는 문맹인 30대 여성에게 책을 읽어주며 성(性)에 눈뜬 10대 소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그리고 있다.

세월이 지나 법대생이 된 소년은 재판 참관을 하게 되는데, 그 여성은 유태인수용소에 불이 나자 문을 잠그고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이 되어 나타난다. 재판에서 모든 죄는 여성에게 씌워지지만 여성은 자신의 결백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소년은 여성이 재판 내용을 담은 기록을 읽을 능력이 없어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녀는 결국 무기징역을 받고 만다. 소년은 여성이 자기 곁을 떠난 사건의 진실을 그때서야 알게 된다.

“사람에게 잠재되어 있을 만한 것이 사건과 진실을 거치면서 극대화한 상태로 나타나는 응답이 가장 강력한 응답입니다.”

소년은 여성을 잊지 못해 결혼 생활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한 채 책을 읽고 녹음한 테이프를 여성에게 보낸다. 여성은 그 테이프를 들으며 글자를 깨우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소년은 답장하지 않고 여성이 가석방되어 보호자를 찾는다는 교도소 전화에 모른 척한다. 출소하는 날 여성은 유태인 피해자 가족들에게 기부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와 함께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남긴 채 목을 매 자살한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 순간이 진실에 여성의 응답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년이 여성을 위해 녹음테이프를 계속 보내는 순간 또한 소년의 응답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소설 속 응답이 좋을수록 삶의 좌표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가 뒤엉켜 버린다고 말했다. 즉 통념의 틀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 좋은 응답이란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목격하고 자신의 눈을 찌른 것도 이에 속한다. 자기 손으로 죽인 이가 아버지인 줄 몰랐다고 버틸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눈을 찌르며 응답한 순간 그는 자유로워졌다. 오이디푸스는 우리의 짐작을 피해 스스로 눈을 찌름으로써 통념에서 벗어난 것이다.

“가장 강력한 응답이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흔들리는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실에 응답하기 위해서 택한 ‘몰락’. 문학작품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감동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몰락의 에티카>라고 제 책의 제목을 지었습니다.”

▲ 신 평론가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와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 문학동네

예수의 죽음도 응답이다. 원수에게 복수로 답하는 것이 아닌 ‘죽음’으로 응답한 것이다.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예숙의 죽음은 사랑이라는 강력한 응답으로 남았다. 신 평론가는 그래서 2000년 넘도록 예수의 응답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며 남아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응답의 단계가 장편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것이 지난 2008년 그의 책 <몰락의 에티카>가 탄생한 배경이다.

문학작품은 모든 일을 사건으로 바라보고 진실을 드러내 보이면서 응답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그는 말했다. 또 문학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극단적 감동이 이런 응답에 있다고 했다.

문학의 세 가지 가치

신 평론가는 문학은 세 가지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무언가를 알게 하는 ‘인식적 가치’, 예술로서 가치를 지니는 ‘미학적 가치’, 마지막으로 ‘정서적 가치’다.

80년대에는 ‘인식적 가치’가 중요했다. 386세대는 ‘미학적 가치’를 부르주아 문화로 무시했다. 사회주의혁명과 소비에트혁명이 시작되면서 문학작품이나 시를 통한 의식화를 우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 시들은 ‘노동시’로 대표된다.

시중에 수많은 소설이 존재하지만 이 가운데 평론가와 일반독자가 좋아하는 소설이 확연하게 갈릴 때 사람들은 비평가들을 비난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작품은 일부러 무시하는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론가와 일반독자의 평가를 확연하게 가르는 것은 ‘미학적 가치’ 때문이다. 즉 미학적 가치를 갖는 소설이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소설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미학적 가치’를 지닌 대표적 장르로 그는 ‘시를 꼽았다. 시에는 오로지 언어만 있고, 언어의 ‘미학적 가치’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질 경우 소설에서 표현하는 미(美)를 영화가 표현하지 못할 때 그 소설은 ‘미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신 평론가는 ‘컨텐츠’, 즉 이야기 재료에 불과한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쉽지만 ‘미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질 때 종종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문학의 가치에는 감동을 주거나 유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정서적 가치’가 있다. 이 또한 문학작품에서 중요한 가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은 인류 최초 문학이론이었다. 그는 그리스 비극을 대상으로 ‘예술작품이란 무엇을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카타르시스‘를 말한다. 일종의 정화적 기능이다. 극장에서 슬픈 영화를 보고 펑펑 울면 개운하고 정화된 느낌을 받는 게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기능은 인간에게 정서적 쾌감을 통해 새로 태어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라 할 수 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이주헌, 이권우, 한홍구, 장승구, 김진석, 신형철, 정희준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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