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건축영화제] ‘도시’ 주제 영화 12편 선보여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는데, 우리는 건축과 도시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을까? 아파트 평수를 재고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만 따지는 건 아닌지. 뉴타운 공약에 한 표 던지는 사람들에게도 건축은 왠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질 것 같다.

개발주의에 온몸을 맡긴 도시들의 공통점

‘건축을 가깝게 대하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에서 시작된 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올해로 4회째를 맞았다. 8일부터 14일까지 이화여대 ECC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이번 영화제는 ‘도시’를 주제로 중·장편 10편과 단편 2편을 포함해 7개국 영화 12편을 상영한다. 지난해에 견주어 상영 편수는 줄었지만 건축사 내부를 알리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환경으로 관심사를 넓힌 점이 눈길을 끈다.

 ▲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서울국제건축영화제. ⓒ SIAFF

개막작 ‘에쿠메노폴리스(Ekumenopolis)’를 비롯해 중국의 도시화와 주거환경 문제를 다룬 ‘어바니제이션 인 차이나(Urbanisation in China)’, 1998년 상계동 달동네 재개발을 다룬 ‘상계동 올림픽’ 등 도시 개발과 사람들을 비춘 다큐멘터리가 한 축을 이룬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모티브로 만든 ‘브라질’과 SF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래닛’에서는 영화감독들이 꿈꾼 미래 도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고 정기용 건축사의 생애 마지막 1년을 기록한 ‘말하는 건축가’와 알프스 산맥 해발 1,300미터에 위치한 수도원의 일상을 담아낸 ‘위대한 침묵’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제 기간에 열리는 ‘호스트 아키텍트 포럼(Host Architect Forum)’은 영화를 본 뒤 국내 대표적인 건축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건축과 도시에 대해 잘 모르는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다.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는 상영작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됐는데 ‘말하는 건축가’ 정재은·유영식 감독, ‘바람 불어 좋은 날’ 이장호 감독, ‘모래’ 강유가람 감독이 초청됐다. 이외에도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와 조성관 문화기행 작가, 박재동 화백 등이 영화와 건축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빈민 밟고 선 거대도시 ‘에쿠메노폴리스’

1900년대 중반 급격한 도시화로 지구가 몸살을 앓을 때 지구적 도시를 상상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스 건축학자 C.A 독시디아스는 인구 증가와 교통 발달로 도시가 크게 발달해 국경을 초월한 거대도시가 등장할거라며 이를 ‘에쿠메노폴리스(Ekumenopolis)’라 불렀다. 아직 이뤄지지 않은 그의 상상은 그보다 작은 규모로 세계 곳곳에 나타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녹지의 2/3 이상을 지워버리고 아파트와 도로로 가득 채운 터키 이스탄불, 저층 주택들로 끝없이 이어진 멕시코시티는 아찔하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끊임없이 개발로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는 도시, 그곳의 삶은 어떨까? ‘에쿠메노폴리스’는 각종 공약으로 4천 번 바뀐 도시계획과 개발업자의 배만 불려주는 정책에 희생당한 판자촌 주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상계동 올림픽’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달동네 주민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탄불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발독재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도시 공통의 문제다.

 ▲ '에쿠메노폴리스'의 한 장면, 터키 이스탄불도 도시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 SIAFF

모두 여섯 장으로 이뤄진 영화는 터키의 정치 상황부터 세계화, 도시 정책, 민주주의 등 각기 다른 관점에서 재개발을 다룬다. 그러면서 시간 순서대로 진행돼 재개발 과정에서 빈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터키 아야즈마(Ayazma) 마을의 어느 가족을 6년에 걸쳐 추적해가며 재개발을 둘러싼 각종 이해관계와 빈민층의 삶을 보여주었다.

돈 앞에 무력한, 동네 지키려는 소망


1990년대 몰아친 신자유주의 바람은 이스탄불에도 불어 도시를 투기장으로 바꿔놓았다.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은 개발도상국가가 성장하려면 도시를 개발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수도를 ‘세계 도시(global city)’로 키워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귀에도 익은 ‘금융 허브’ ‘문화 도시’ 같은 컨셉트들이 터키 수상의 입에서 곧잘 오르내렸고 국가 주도로 대규모 토목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필요한 돈은 공공기관을 시장에 내다 팔아 구했고 결국 주택과 도시 개발은 기업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지난 몇 십 년간 농업기반이 몰락해 수도 이스탄불은 일거리를 찾으려는 노동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우리로 치면 판잣집인 ‘게제콘두’에 살며 주변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난데없는 재개발계획에 집이 헐리고 거리로 나앉는데 3년간 텐트 치고 살며 시청 앞에서 시위를 한다. 정부는 그들에게 아파트 입주 기회를 주지만 몇 년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받고 살아가는 그들은 “그 돈이 있으면 왜 텐트에서 3년이나 살았겠냐”며 따지지만 정부는 아무 대꾸가 없고 개발업자는 정부 탓만 한다. 영화관 곳곳에서 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그들은 60km 떨어진 신도시로 이주당한다. 그러나 일자리도 없고 고향도 그리워 되돌아온다. 몇 천 가구를 수용했던 신도시는 다시 폐허가 되고 빈민들은 막대한 빚을 안은 상태. 그 와중에 국가와 개발업자는 돈을 벌어 토목공사를 또 벌인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해서 EU에 가입할 것인가”라는 항의에 안타깝다 못해 울분이 치민다. “돈엔 관심 없고 동네를 지키고 싶다”는 빈민들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나 있을까? 표를 얻기 위해 개발계획이 자꾸 나오는 터키에서 앞으로 50개 이상 동네가 철거 위협에 처할 거라고 다큐멘터리는 말한다.

 

남이 만든 공간에서 우리가 만들어진다면…

도시로 관심사를 넓힌 영화제는 첫 시작부터 개발로 일그러진 도시의 실상을 드러냈다. ‘어바니제이션 인 차이나’와 ‘상계동 올림픽’도 비슷한 소재를 다룬다. 물론 영화제가 더 나은 건축과 도시를 만들려는 건축사의 활동이나 미래 도시에 대한 ‘유쾌한’ 상상들도 보여주기는 한다. 한편으로 진지한 내용들에 거부감이 일지도 모르나 ‘도시와 삶’에 대한 생각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영화제의 의도와 잘 어울리는 게 아닐까? ‘에쿠메노폴리스’가 끝났을 때, 영화 속 인물이 던진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관객들은 한동안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우리를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열망만 담은 공간을 만들어야죠.”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