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이주헌 서울미술관 관장
주제: 서양 역사화의 이해

두 천재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조언

"아침을 꼭 먹어라. 팁을 많이 주어라. 기회와 유혹을 분간할 줄 알아라."

3인치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강익중이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향안에게 들은 말이다. 김향안은 이상과 김환기라는 두 천재의 아내였다.

지난 21일 서울미술관에서 있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인문교양특강’에서 이주헌 서울미술관장은 “김향안 여사의 조언에 인문학의 기본자세가 담겨있다”며 “인문학이란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장은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와 <한겨레> 미술담당 기자에 이어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다 지난 8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 옆에 개관한 서울미술관 초대관장으로 부임했다.

▲ '역사의 미술관' 강의를 시작하는 이주헌 서울미술관장. ⓒ 허정윤

김향안이 아침을 꼭 먹으라고 한 것은 식사를 제때 하지 않아 약해진 몸이 쉬운 길만 선택하고 해이해진 마음에 자칫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팁을 많이 주라고 한 것은 일하는 사람 뒤에 언제나 가족이 딸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회와 유혹을 분간할 줄 알라고 한 것은 일의 성패가 결국 이 분별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회와 유혹을 분간하는 방법은 이것이 나에게만 이익이 되는지, 민족과 역사, 세계에 도움이 되는지를 놓고 보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단순해 보이는 세 마디 조언에 인간의 조건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관장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고 해서 읽고 배우는 것만으로는 깊은 깨우침을 얻기 힘들다. 대신 그는 경험과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유하고 이와 관련된 삶의 경험을 쌓는 게 그냥 공부하는 것보다 인문학과 더 닿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미술도 인문학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미술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을 통해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감상하는 것입니다. 특히 서양 역사화는 인간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주죠.”

동양에 없는 역사화가 서양에 많은 이유 

역사화란 역사적인 사건이나 영웅의 일대기, 업적 등을 그린 그림이다. 역사화는 단순한 역사 주제를 넘어 보편적인 가치와 교훈, 영웅적인 모범과 덕을 주로 표현한다. 또한 역사화는 인간과 삶의 조건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와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런데 동양에서 역사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순신 일대기를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역사화와 비슷한 수원행렬도 같은 의궤가 있으나, 이는 역사화라기보다 사실적인 기록에 가깝다고 이 관장은 설명했다.

“서양에서는 역사화가 중요한 장르였어요. 성경이나 나폴레옹과 관련된 그림이 매우 많은 점을 보면 알 수 있죠. 르네상스 시대 이후 역사화가 매우 중요한 장르로 발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17세기쯤 장르에 위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왕립미술원에서 장르의 위계질서를 구분했어요. 물론 역사화가 제일 상위를 차지했지요. 가장 밑에는 정물화, 그 다음이 풍경화, 동물화, 초상화, 역사화 순서였어요. 이는 인간중심적인 서양의 사고를 잘 보여줍니다.”

오로지 신만 바라보던 중세 암흑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자체에 초점을 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면서, 그리는 대상이 가진 생명력으로 위계질서를 정한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을 그린 정물화를 가장 하위 장르로 보고 생명력이 가장 강한 인간을 최고 상위 장르로 보았다.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림에 많이 담지 않았다. 대신 무위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 우리나라는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를 꼽으라면 산수화라고 대답할 수 있다. 옛사람들은 산수에 대자연과 우주의 법칙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우주의 법칙을 가진 풍경을 그렸다. 자연을 움직이는 에너지와 리듬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그 ‘기운생동’을 그림에 표현했다. 이에 맞춰 옛날에는 좋은 그림을 ‘뜻을 얻은 그림’이란 뜻의 ‘득의작(得意作)’이라 칭했다. 걸작이란 표현은 근대에 들어와서 생긴 이름이다.

“그렇다면 역사화는 사실만 그린 그림인가? 그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신화와 전설도 역사화의 일부에 속했어요. 보편적인 가치와 모범을 보여주고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역사화의 범주에 넣었지요. 역사화가 ‘히스토리 페인팅’(history painting)으로 불리다 ‘스토리(story) 페인팅’ 또는 ‘내러티브(narrative) 페인팅’으로 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화는 문학작품 중에서 서사시와 비슷해요. 스토리가 있죠. 역사화는 인간의 조건과 삶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물론 정서적, 정신적으로 무언가 배울 게 있어요. 이게 바로 그림을 통해서 공부하는 인문학입니다.”

30대와 60대 미켈란젤로, 무엇이 달랐나

이주헌 관장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보면 역사의 시작과 끝은 물론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노인이 된 미켈란젤로 내면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중 ‘인간의 창조’ (역사의 시작).

“신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인간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죠. 미켈란젤로가 참 뛰어난 점이 있어요. 신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표현을 검지손가락을 마주하는 것으로 표현했어요. 보이지 않는 생기가 전달되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요. 이전까지는 입김으로 숨을 불어넣었다는 표현밖에 하지 못했어요. 영화 <이티(ET)>에서 서로 손가락 마주하는 장면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차용한 겁니다.”

▲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역사의 끝).

60대가 된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은 그림 곳곳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십자가나 면류관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메시지들이 그림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세바스티앙은 화살, 카타리나 성녀는 수레바퀴조각을 들고 있는데 이는 순교의 상징이다. 다른 성인들은 자신이 죽을 때 사용됐던 물건을 들고 있다. 석쇠 위에서 산 채로 구워진 성 로렌조는 석쇠를 들고 있고, 순교자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의 벗겨진 살껍질을 들고 있다. 자세히 보면 살껍질에 있는 얼굴과 살아있는 바르톨로메오의 얼굴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살껍질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신 앞에서 자신은 껍질만도 못한 존재라는 겸손의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 ‘최후의 심판’ 중 바르톨로메오 포커스.

30대의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통해 활력과 생기를 표현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된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서 그동안 관찰해온 인간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 수난을 그리고, 여기에 바르톨로메오의 살가죽을 표현해 자신의 겸손함을 드러냈다. 그 앞에서 숙연한 마음이 드는 건 대작이 주는 위압감이 아닌 이런 작가의 정신 때문이리라.

영웅이 된 ‘불륜의 씨앗’

이주헌 관장의 설명을 듣고 보면 한 장의 그림이 생생한 이야기로 변신한다. 그는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에우로페의 납치’와 18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의 ‘뱀을 목 졸라 죽이는 어린 헤라클레스’로 멈출 수 없는 제우스의 바람기와 유럽의 탄생을 이야기했다.

▲ 티치아노, ‘에우로페의 납치'.

“에우로페가 해안가에서 소 한 마리를 만났는데 소가 너무 순하고 잘생겼어요. 등에 올라탔는데도 얌전하게 있던 소가 갑자기 에우로페를 등에 태운 채로 전력 질주합니다. 이 그림에서 에우로페가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소뿔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이 보이죠. 크레타 섬까지 에우로페를 데려간 소는 제우스로 변신해요. 에우로페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제우스의 만행이죠. 에우로페(europe)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Europe)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 레이놀즈, ‘뱀을 목 졸라 죽이는 어린 헤라클레스’.

결혼과 가정의 신인 헤라 여신은 남편 제우스의 바람기에 ‘가정의 신’이라는 칭호가 무색할 만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녀는 헤라클레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다. 제우스가 에우로페 납치 사건으로도 모자라 유부녀인 알크메네와 정을 통해 태어난 아기가 바로 헤라클레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신탁이 내려지자 분노가 극에 달한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죽이기 위해 뱀을 보낸다. 하지만 그리스 전설, 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가 아기임에도 뱀의 목을 꽉 쥐고 목 졸라 죽이는 이야기가 그림 한 장에 모두 담겨 있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화가들의 인문정신

▲ 다비드, ‘브루투스에게 아들을 날라 오는 형리들’.

“오른쪽의 한 여인이 손을 들어서 탄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바라보는 쪽을 보니 한 남자의 발이 보여요. 식구가 죽어서 들어오니까 남겨진 가족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이에요. 가만히 보니 왼쪽에 앉아있는 남자도 고통스러운 표정입니다. 이 남자는 브루투스 왕입니다. 이 그림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를 잘 보여주고 있어요. 브루투스는 폭군을 내쫓고 공화정을 세운 로마의 지도자였습니다. 브루투스의 아들은 아버지가 가문의 특권을 내놓는 게 불만이었어요. 그래서 반군과 내통하여 반란의 음모를 꾸몄죠. 그런데 그 음모가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어요. 그 재판을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맡게 됩니다.”

브루투스는 아들의 반란죄에 가차없이 사형을 선고한다. ‘너는 대역죄를 지었다. 동포와 나라를 배반했다. 용서할래야 용서할 수가 없다.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가장 큰 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형!’ 함께 반란을 꾀한 다른 아들에게도 가혹한 판결을 내린다. ‘너는 형의 음모를 알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죄에 가담한 거나 다름없다. 너도 사형에 처한다.’

“그림 속 어머니는 슬퍼하며 한탄하나 아버지는 슬퍼하는 부인과 딸 곁으로 다가갈 수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브루투스가 이런 읍참마속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국가를 지킬 수 없었어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역사적 이야기입니다. ‘공적인 이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감내할 수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그림이지요.”

▲ 폴 들라로슈, ‘제인 그레이의 처형’.

그림 속에서 눈을 가리고 있어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제인 그레이의 처형‘에는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깔려있다. 제인 그레이는 신교를 지키고 싶었던 에드워드6세에 의해 여왕으로 즉위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1세에게 여왕 자리를 넘겨주면 신교가 위험할 것이라는 에드워드6세의 판단에 왕좌를 빼앗긴 메리1세는 분노에 빠져 런던 의회를 무력으로 압박해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제인 그레이는 여왕 즉위 9일 만에 메리1세에 의해 폐위돼 런던탑에 갇혀 지내다 6개월 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처형된다.

폴 들라로슈는 프랑스 화가다. 그런데 그가 어쩌다 영국의 역사화를 그리게 됐을까? 들라로슈는 프랑스혁명이 성공하고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인 1797년에 태어났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때에 기요틴 곧, 단두대가 발명됐고, 수많은 사람이 단두대에 목이 잘려나갔다. 도끼로 연약한 소녀의 목을 치는 그림을 통해 오히려 단두대로 마구 목을 자르는 프랑스 사회의 잔인함과 불안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당시 이 그림을 본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을 떠올리며 그림을 극찬했다고 한다.

그림으로 인생의 목적을 되돌아보다

‘인생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장하고 나누는 데 있다. 인생에서 해 온 모든 일들을 되돌아볼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고 그들을 이긴 순간보다 그들의 삶에 당신이 기쁨을 준 순간을 회상하며 더 큰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미국의 랍비 해럴드 쿠쉬너의 말이다. 나눔은 돈이 많아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풍요로운 사람만이 나눠줄 수 있다. 나눔은 희생처럼 보이지만 나눠주는 사람이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축복이기도 하다. 어쩌면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우리와 시대를 초월한 가치나 교훈을 나눠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주헌 관장은 마지막으로 미술 작품을 통한 인문학 학습을 거듭 강조했다.

“그림을 통해, 학문이 아닌 직관과 감성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강의를 경청하는 학생들과 이주헌 관장. ⓒ 허정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이주헌, 이권우, 한홍구, 장승구, 김진석, 신형철, 정희준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