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찬 칼럼] 당신은 라스꼴리니코프인가

좋은 기사를 평가하는 독자의 기준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다양성’ 또는 ‘다성성’의 가치를 새로 알게 됐다. 독자는 한 사람만 취재한 기사를 싫어했다. 하나의 출처에 기대어 ‘엄청난 일을 독점 보도한다’는 식의 기사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찬반양론을 소개하는 것도 부족하다고 여겼다. 형식적 균형이나 기계적 중립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투였다.

대신,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기사를 좋아했다. 여러 곳, 여러 문서, 여러 자료를 담은 기사도 좋아했다. 그러니, 지난 글에 이어 독자의 잣대를 종합하면 이렇다. 독자는 정보 원천을 직접 취재한 기사를 좋아한다. 그러한 원천 정보가 매우 많은 기사라면 독자는 더욱더 좋아한다.

나로선 놀라운 발견이었다. 독자의 여러 잣대를 하나로 표현한다면, 결국엔 다양성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 다양성은 기사의 모든 측면에 걸쳐 있다. 의외의 문제를 다루는 주제 다양성, 여러 시각을 보여주는 관점 다양성, 당사자·관련자·전문가를 아우르는 취재원 다양성, 문서 분석·심층 인터뷰·현장 르포를 넘나드는 취재 방법 다양성을 독자는 두루 중시했다.

해외의 다른 연구를 보니, 다른 나라 독자들도 비슷했다. “다성성(多聲性)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어느 해외 언론학자는 평가했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정보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가 하나의 정보와 관점을 담은 기사를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성성(polyphony 또는 multivocality)은 다양성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개념이다. 이를 처음 제시한 이는 러시아 비평가인 미하일 바흐친이다. 그는 ‘죄와 벌’ 등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작가가 성격을 부여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동적·창조적 인격으로서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소설에서 드러내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이 가운데 어느 방향으로 독자를 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죄와 벌’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죄와 벌’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바흐친의 해석 덕분에) 도스토옙스키에 이르러 문학은 새롭게 정의됐다. 소설은 무엇인가. 작가가 설정한 단일한 세계관을 위해 등장인물을 조작적으로 배치하는 글인가. 아니면, 다양한 경험과 관점이 교차하는 여러 인물을 통해 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주는 글인가.

문학이 그러하다면, 기사는 어떤가. 기자가 설정한 방향에 맞춤한 취재원을 기계적으로 배치하는 글인가. 아니면, 다양한 사람·현장·문서가 입증하는 여러 시선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주는 글인가.

그런 점에서 다양성과 다성성은 조금 다르다. 다양성은 그저 복수의 정보를 나열하는 것으로 충족될 수 있다. 그러나 다성성을 이루려면, 하나로 종합되지 않으면서도 복잡성을 보여주는 ‘대화적 또는 간주관적 정보’가 꼭 필요하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다성성은 저널리즘의 새로운 원칙이 되어야 마땅하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세계의 본질이 곧 다성성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정직하게 드러낸 기사는 다성적일 수밖에 없다. 독자는 다성적 기사를 통해 세계를 가장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다. 생생한 감각이야말로 올바른 사유와 판단의 토대인데, 이것은 저널리즘의 공적 역할과 정확히 일치한다.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코프는 악을 징벌할 특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노파를 단죄하여 죽인다. 기자는 라스꼴리니코프인가. 단일한 원칙으로 무엇인가 단정할 수 있는가. 단순한 규범으로 누군가 단죄할 수 있는가. 아니면, 기자는 토스토예프스키인가. 살인 사건에 주목하되, 범죄자, 피해자, 판관, 그들의 친구와 가족을 두루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는가.

소설에서 라스꼴리니코프는 먼 곳으로 유배되는 벌을 받았다. 다성성 시대를 단일하게 보도하는 것은 기자로서 죄짓는 일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지 않은 죄다. 죄를 자꾸 지으면, 기자도 벌 받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해 고립될 것이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 12월23일 자 ‘사실과 의견’ 코너에 실렸던 것을 신문사의 허락을 얻어 일부 수정해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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