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찬 칼럼] 지렁이, 제사장, 정치인, 과학자의 차이

2004년 3월12일 아침, 전화기에 대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전화 연결된 날이었다. 한나라당을 출입하던 나에게 진행자는 대본에 없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 정치부 막내 기자는 더듬거렸다. 명성 높은 진행자가 물었다. 오늘 한나라당이 대통령 탄핵안을 상정할 것으로 보는가. 무리수를 두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명민한 진행자는 다시 물었다. 탄핵 가능성이 정말 없다고 보는가. 다시 답했다. “그럴 리 없다.”

몇 시간 뒤, 의사당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날치기로 통과됐다. 생방송으로 전국에 전파된 예측이 무너져버린 현장을 나는 생생하게 목격했다. 기사를 마감하고 폭음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한나라당의 최후’라는 글을 썼다. 한나라당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몰아붙였다. 방송에서 말로 저지른 착오를 인터넷에서 글로 반복한 것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예측과 달리 한나라당은 최후를 맞지 않았다. 오히려 연이어 집권했다. 그날 아침, 진행자는 왜 나를 골랐을까. 나는 왜 그렇게 답했을까. 왜 그런 글을 썼을까.

20년 전의 그날, 진행자는 의견을 묻지 않았다. 대통령이 탄핵되어야 하는지 어떤지 묻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벌어질 일을 물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잘 아는 사람이 답할 질문이었다. 답변자로 한나라당 출입 기자가 적합했다. 그런데 생방송으로 연결된 기자는 그 당의 일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취재를 게을리한 것이다. 표피적 정보만 어설프게 연관시켜 사태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해석의 경계를 넘어 강력한 의견으로 질주해버렸다. 그마저도 오류로 판명될 의견이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SBS

해석(interpretation)은 사실의 연관을 밝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A와 B가 무관한지, 인과관계인지, 그저 상관관계인지, 얼마나 관련됐는지 밝히는 것이 해석이다. 제대로 해석하려면 사실 수집과 사실 분석의 단계를 잘 밟아야 한다. 많은 사실을 수집해 정확히 파악하고, 덩이로 뭉쳐진 사실을 촘촘히 분해한 뒤에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해석은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실을 수집하여 분석하면 오늘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 오늘의 여러 사실을 수집하여 분석하면 내일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니 해석은 위대하다. 다만 위험하다. 누구나 해석하지만, 모든 해석에는 수준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해석은 잘못된 원인과 전망을 낳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지렁이는 ‘땅 위로 기어가도 되겠구나’라고 해석한다. 해 뜨는 오후에 그 지렁이는 말라 죽을 것이다. 사람이 동물의 수준으로 해석하는 일도 있다. 고대의 제사장은 해가 뜨고 지는 사실을 보았다. 뜨고 지는 동안 해가 반원을 그리는 사실도 보았다. 두 사실을 관련지어 ‘해가 지구를 돈다’고 해석했다. 오류로 판명되기까지 수천 년이 걸렸다. 불과 수십 년 전 오류에서 배우지 못하는 해석도 있다. 좌익 독립운동가의 흉상이 교정에 있다는 사실과 흉상을 보면 학생들이 친북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가설을 인과관계로 엮는 해석이 오늘에도 등장한다.

과학적 접근은 해석을 극도로 신중하게 다룬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과학적 접근은 해석을 극도로 신중하게 다룬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니 해석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 수집과 분석의 수준이다. 지렁이는 강수 시간에 대한 정보 수집을 생략했고, 제사장은 다른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종합하지 않았다. 정치인은 그 시대의 좌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거 정부가 그를 기린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 수집을 생략했거나 무시했거나 알고도 모른 체 했다.

이에 비해 과학적 접근은 해석을 극도로 신중하게 다룬다. 인과관계를 좀처럼 단정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더 많은 데이터와 검증이 필요하다고 물러선다. 수집한 사실, 분석 방법, 연구 한계를 보여주면서 유보적 가설만 내놓기도 한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겸손함이고 정직함이다. 확신에 찬 순간조차도 ‘해석에 신중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과학적 규범을 되새기는 용기다.

어느 때보다 좋은 해석이 요구되는 시절이다. 이런 시절이면 좀 무서워진다. 좋은 해석은 내가 잘 감당해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에 왜 그리 서툴렀는지 이제야 알게 됐을 따름이다. 기자의 해석이 지렁이, 제사장, 정치인, 과학자 가운데 누구의 것을 닮아야 하는지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 9월4일 자 ‘사실과 의견’ 코너에 실렸던 것을 신문사의 허락을 얻어 일부 수정해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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